퇴직연금 시장의 중심축이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과거 확정급여(DB)형과 확정기여(DC)형 중심이던 시장이 개인형퇴직연금(IRP)으로 재편되는 흐름이다. 제도 변화와 인구 구조 변화가 맞물리면서 ‘적립 중심’에서 ‘인출 중심’으로의 전환도 본격화되는 모습이다.IRP 가입자는 2015년 말 약 75만명에서 2024년 말 359만명을 돌파하며 10년 새 5배 가까이 증가했다. 같은 기간 DB형 가입자는 306만명에서 313만명으로 사실상 제자리걸음을 했고, DC형 가입자는 218만명에서 408만명으로 늘었지만 IRP의 성장세에는 미치지 못했다.적립금 증가세는 더욱 가파르다. 2015년 말 13조2000억원에 불과했던 IRP 적립금은 2025년 말 130조9000억원으로 10배 가까이 확대됐다. 연평균 성장률 역시 IRP가 27.4%로 DB형(10.2%), DC형(17.0%)을 크게 앞질렀다. 퇴직연금 시장이 DB형과 DC형 중심에서 IRP 중심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는 셈이다.제도 변화에 은퇴 인구까지…IRP 성장 견인IRP의 급성장은 정책적 지원과 구조적 요인이 동시에 작용한 결과다. 우선 가입 대상이 크게 확대됐다. 과거에는 퇴직연금에 가입한 근로자만 IRP에 가입할 수 있었지만, 현재는 공무원, 교사, 자영업자 등 소득이 있는 누구나 가입할 수 있다.세액공제 혜택 확대도 중요한 요인이다. IRP 가입자는 납입 금액에 대해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는데, 공제 한도는 2012년 400만원에서 2015년 700만원, 2023년에는 900만원으로 꾸준히 확대됐다. 절세 수단으로서의 매력이 커지면서 개인들의 자금 유입이 빠르게 늘었다.여기에 퇴직금 수령 방식 변화도 영향을 미쳤다. 과거에는 퇴직연금 가입자만 55세 이전 퇴직 시 IRP로 이체해야 했지만, 현재는 가입 여부와 관계없이 55세 이전 퇴직 시 퇴직금을 IRP로 수령하도록 제도가 확대됐다. 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IRP로 자금이 유입되는 구조가 형성됐다.무엇보다 결정적인 변수는 ‘2차 베이비부머’의 대규모 은퇴다. 1964년부터 1974년 사이 출생한 이들은 약 954만명에 달하는 대규모 인구 집단으로, 퇴직연금 도입 이후 장기간 적립을 이어온 세대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은퇴하면서 DB형과 DC형에 쌓여 있던 자금이 IRP로 이동하고 있다. 이는 퇴직연금 시장이 ‘직장인 적립’에서 ‘퇴직자 인출’ 중심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변화다.퇴직금을 IRP로 이체해 연금 형태로 수령할 경우 다양한 세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우선 퇴직소득세 부담이 줄어든다. 퇴직금을 일시금으로 수령하면 전액에 대해 퇴직소득세가 부과되지만, 연금으로 나눠 받을 경우 30~50% 수준의 세액 감면 혜택을 받을 수 있다.운용수익에 대한 과세 방식도 유리하다. 일반 금융상품의 이자와 배당소득은 15.4% 세율로 과세되고, 연간 2000만원을 초과하면 종합과세 대상이 된다. 반면 IRP를 통해 발생한 운용수익을 연금으로 수령할 경우 3.3~5.5%의 낮은 연금소득세가 적용된다. 일정 금액 이하일 경우 분리과세가 가능해 세 부담을 효과적으로 낮출 수 있다.건강보험료 측면에서도 장점이 있다. 퇴직 후 대부분의 근로자는 지역가입자로 전환되는데, 이 경우 다양한 소득이 건강보험료 산정 기준에 포함된다. 다만 현재 사적연금소득은 건강보험료 부과 대상에서 제외돼 있어 IRP를 활용할 경우 보험료 부담을 줄일 수 있다.이처럼 세제와 보험료 측면에서의 이점이 결합되면서 퇴직금을 일시금이 아닌 연금 형태로 수령하려는 수요가 빠르게 늘고 있다.
원리금보장 넘어 투자형으로…연금 운용도 진화IRP 운용 방식도 변화하고 있다. 과거에는 원리금보장 상품 중심으로 자산을 운용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저금리 장기화와 기대수명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투자형 상품 비중이 확대되는 추세다.현재 IRP 가입자는 예금뿐 아니라 펀드, ETF, 리츠 등 다양한 금융상품에 투자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장기적으로 수익률을 높이면서 연금 수령액을 확대하려는 전략이 확산되고 있다.연금 수령 방식도 다양하다. 종신형, 금액지정형, 기간지정형 등 다양한 형태가 있으며, 상황에 따라 수시 인출도 가능하다. 종신형은 평생 연금을 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연금액이 상대적으로 적고 중도해지가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반면 기간지정형이나 금액지정형은 유연성이 높은 대신 수익률에 따라 연금 수준이 달라질 수 있다.IRP 시장의 성장은 단순한 상품 확대를 넘어 퇴직연금 시장 구조 자체를 바꾸고 있다. 고령화와 은퇴 인구 증가 속에서 IRP는 노후 소득 관리의 핵심 수단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제도적 기반 확대와 투자 다변화가 맞물릴 경우 IRP 중심의 연금 시장 재편은 더욱 가속화될 전망이다.김동엽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상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