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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엔드 시계, 최고의 기술은 우주를 향한다 [이윤정의 언베일]

전문가 칼럼

하이엔드(최고급) 시계의 가치는 장인의 손길과 복잡한 기계식 무브먼트에서 비롯된다. 수백개의 부품이 맞물려 오차를 최소화하는 정밀함은 하이엔드 워치 메이킹의 상징이었다.하이엔드 시계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 시절, 스위스의 한 시계 브랜드 출장에 동행한 저널리스트는 “시계는 자동차와 같아서 기계공학을 알면 훨씬 이해하기 쉽다”고 말해 필자의 기를 죽이기도 했다.설계부터 제작까지…IWC, 우주 비행용 시계 선봬기술에 기반을 둔 하이엔드 시계는 경쟁이 심화하면서 기술력의 수준도 나날이 진화했다. 주요 시계 브랜드는 ▲우주 탐사 ▲항공우주 산업 ▲모터스포츠 ▲신소재 공학 등 최첨단 기술을 시계에 담아내며 무한 경쟁에 돌입한 지 오래다. 1969년 인류가 처음 달에 착륙할 당시 우주 비행사가 착용한 오메가 시계는 오메가뿐 아니라 시계 산업 전체에 놀라움을 줬다. 오메가가 지금까지도 혁신적인 기술의 상징으로 대표되는 이유다.꿈으로만 여겼던 상업용 우주 탐사와 여행이 가시화되면서 시계 산업에서도 우주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지금까지 우주를 위한 시계는 지상용으로 제작된 것을 항공시계로 개조한 게 대부분이었다. 최근에는 우주 비행에 필요한 특정 요구 사항을 위해 처음부터 설계된 시계를 내놓는 상황이다. 올해 IWC 샤프하우젠(IWC Schaffhausen, 이하 IWC)이 소개한 ‘파일럿 벤처러 버티컬 드라이브’(Pilot’s Venturer Vertical Drive)는 유인 우주 비행과 우주에서의 시간 측정이라는 목적을 위해 처음부터 설계 및 제작됐다. 파일럿 벤처러 버티컬 드라이브는 장갑을 착용한 우주비행사도 손쉽게 시계를 조작할 수 있도록 크라운 대신 혁신적인 회전 베젤 시스템을 적용했다. 가벼운 화이트 산화지르코늄 세라믹과 세라타늄 소재로 제작해 내구성과 온도 변화에 대한 저항성을 높였다. 세라타늄은 티타늄의 가벼움과 구조적 안정성에 세라믹의 높은 경도와 스크래치 저항성을 결합한 소재다.IWC의 브랜드 파트너이자 차세대 우주정거장을 개발 중인 미국 우주개발 기업 바스트(Vast)의 엄격한 테스트를 거친 파일럿 벤처러 버티컬 드라이브는 세계 최초의 상업용 우주정거장이 될 헤븐-1(Heaven-1)으로의 비행을 위해 바스트의 우주 비행 인증도 획득했다.파일럿 벤처러 버티컬 드라이브는 IWC의 브랜드 파트너인 미국 우주개발 기업 바스트(Vast)의 테스트를 거쳐 차세대 상업용 우주정거장 헤븐-1(Heaven-1) 비행을 위한 우주 비행 인증도 획득했다. 크리스 그레인저-헤어 IWC 최고경영자(CEO)는 “IWC의 엔지니어링 부서인 XPL이 파일럿 벤처러 버티컬 드라이브를 개발할 때 단순히 기존의 시계를 우주에서도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 아니다”며 “우주비행사를 위한 툴 워치(tool watch)라면 ▲기능성 ▲조작의 용이성 ▲시간 표시 ▲소재 구현의 측면에서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지 백지상태부터 정의해 나온 시계”라고 강조한다. 리차드 밀, 시계에 ‘항공우주 산업·F1 기술’ 적용신소재 기술의 정점을 보여주는 브랜드로 리차드 밀(Richard Mille)을 빼놓을 수 없다. ‘손목 위의 레이싱 머신’이라는 별명을 가진 리차드 밀은 항공우주 산업과 포뮬러 원(F1) 기술을 적극적으로 시계 제작에 도입한 브랜드다. 새로운 RM 55-01 매뉴얼 와인딩은 5g 미만의 초경량 칼리버 RMUL4를 탑재했다. 오토매틱 무브먼트에는 필수적인 로터가 없는 수동 와인딩 시스템을 채택해 빛이 무브먼트 사이를 자유롭게 통과하며 스켈레톤 무브먼트의 매력을 한껏 발산한다. 특기할 만한 소재는 베이스 플레이트에 사용된 5등급의 티타늄으로, 항공우주 산업에서 널리 사용되는 신소재다. 5등급의 티타늄 소재는 리차드 밀의 시계에 전반적으로 사용되는 소재지만, 이 소재를 가공하는 건 여전히 큰 도전이다. 소재의 경도가 높은 데다 리차드 밀의 엄격한 기준 때문에 초기 작업인 절삭부터 난제다. 흥미로운 부분은 이러한 기술 경쟁이 단순히 ‘비싼 시계’를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시간을 측정하는 도구에서 시작된 기계식 시계는 인류가 도전하는 극한의 환경을 함께 탐험하는 기술 플랫폼으로 진화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많은 브랜드가 ▲항공우주 기업 ▲자동차 제조사 ▲F1팀 ▲연구기관 등과 공동 개발을 통해 새로운 소재와 구조를 시험 중이다. 오메가는 여전히 미 항공우주국(NASA)의 달 탐사 역사와 함께 우주 시계의 상징적 위치를 이어가고 있다. 위블로는 사파이어 크리스털과 컬러 세라믹 가공 기술을 발전시키는 중이다. 필자는 스위스의 하이엔드 시계 워크숍에 방문할 기회가 많았다. 먼지 한 점도 용납하지 않는 깔끔하고 최첨단의 설비를 자랑하는 워크숍에 가면 하얀 가운을 입은 장인들이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수많은 브랜드 워크숍 책임자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들의 고민이 “숙련된 장인을 구하기가 어렵다”는 점에 놀라곤 한다. 가장 최신의 기술을 실제로 시계로 구현하는 건 결국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다. 우주로 향하는 기술력을 갖췄지만 여전히 사람의 손으로 제한된 수량만 고집하는 하이엔드 시계. 인간과 기술의 조화를 이보다 잘 설명할 순 없다.

2026.08.04 10:00

4분 소요
국책은행들의 지방분산 이전...금융허브 '역행' [순화동필]

전문가 칼럼

정부가 지난 7월 14일 관계부처 합동으로 내놓은 ‘2026년 하반기 경제성장전략’에 따르면, 올해 하반기 중 제2차 공공기관 이전 계획을 마련하고 내년부터 선도기관을 중심으로 이전하려고 한다. 기본적인 취지는 기존의 수도권에 집중된 1극 체제에서 벗어나 국가기능과 산업을 전국적으로 재배치하기 위해, 전국을 ‘5극 3특’으로 대변되는 광역권 단위로 나누어 경제, 생활 및 행정 등을 묶어 각 권역별 성장엔진을 육성하고 특화산업을 선정해 투자, 인프라 및 규제특례 등 패키지 지원으로 다극형 성장체계로의 대전환을 꾀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반도체, 피지컬 AI 및 AI 데이터센터 분야 등에 대한 대규모 투자로 총 4755조원을 투입하여 향후 대한민국의 미래 50년을 좌우할 3대 메가프로젝트 발표가 추가되면서, 향후 매우 구체적이면서도 당장 집행될 가능성이 높은 정책으로 국내외적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의미있게 주목받고 있다. 그간 세계경제를 이끌었던 개방경제와 글로벌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하는 신자유주의가 주춤하고 새로운 형태의 경제블록화가 진행되고 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국가적 차원에서 인공지능(AI) 산업을 전제로 한 경제정책의 일환으로 보이고 적시성이나 방향 측면에서 매우 적절한 조치로 보인다. 지난 60~70년대 경제개발이나 2000년대 IT산업정책에 버금가는 국가적 대전환 정책으로도 평가된다. 물론 이번 정책의 혜택에서 제외된 일부 지역의 반발과 여전한 정부주도의 산업정책에 대한 비판도 있지만, 국내외 산업전환기적 필요성과 지역 균형발전이라는 정책적 대의명분은 충분하다고 본다. 섣부른 지방 분산은 기존 허브 정책 역행이러한 필요성과 방향성에 대한 공감에도 불구하고, 금융을 전공해 온 본 저자는 해당정책내 주요 국책은행들의 지방 이전이라는 세부정책에 대해서는 선뜻 동의하기 힘들다. 그간 산업화 과정에서 초래된 지역간 불균형 발전에 따른 수도권 인구집중을 완화하고 자립형 지방화를 위해 지난 2003년부터 2019년까지 추진되었던 제1차 공공기관 지방이전 사업의 공과와는 별개로, 애초의 사업목적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러한 정책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효과적인 실행방안이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 선행되어야 한다. 특히 여러 이해관계로 인해 지나치게 분산된 공공기관의 이전은 해당지역에 대한 경제적 혜택이나 정책적 효과가 매우 제한적이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그 와중에 같이 시행되었던 주요 금융기관들의 지방이전에 대한 효과 역시 냉정하게 되돌아봐야 한다. 단순 행정지원이 아닌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의 경우 더욱 신중할 필요가 있다. 금융은 산업특성상 전문인력간 잦은 대면접촉과 촘촘한 인적 네트워킹을 통한 정보교환이 경쟁의 핵심 요소다. 좁은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클러스터링 경향이 매우 높다. 주요 금융업무 외에도 관련된 법률서비스·회계·정보통신 및 교육기능 등이 중심이 되어 금융서비스 클러스터를 형성하므로, 세계의 주요 금융중심지는 한 나라의 경제수도에서도 유독 접근성이 가장 좋은 노른자위 도심지역에 집적되는 경향이 이를 뒷받침한다. 뉴욕의 월스트리트나 런던의 더시티가 대표적이다. 한국도 일찍이 2003년에 ‘동북아 금융허브 로드맵’을 수립하여 우리나라에 금융허브 기반을 구축하려 했고, 2008년 이후 정부를 중심으로 ‘금융중심지 기본계획’을 수립하여 수차례에 걸쳐 일관되게 추진해 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따라서 이번에 또다시 제기된 국책은행들의 지방분산 이전은, 국내금융산업의 경쟁 기반을 근본적으로 저해할 뿐만 아니라 기존의 금융중심지 육성정책의 일관성도 훼손하는 잘못된 정책 방안으로 이해된다. 정책금융 본연 기능 지킬 혜안 필요이번에 지방이전 대상이 되는 국책은행들은 저마다 설립취지와 배경은 다르지만 정상적인 금융시장 접근이 취약한 국내산업부문에 대한 금융지원이라는 존립근거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국책은행들의 지방분산 이전은, 대외적으로 그간 클로스터링을 전제로 동북아 금융허브를 지향하던 정책적 일관성이 흔들리게 된다. 대내적으로 국책은행들의 정상적인 정책금융기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국책은행은 정책금융 담당기관으로서 금융당국과 민간 금융기관들, 그리고 관련 금융서비스를 기대하는 기업들과의 소통과 협력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국책은행의 지방분산 이전은 유관기관과의 물리적 거리로 인해 교류와 소통이 줄어들어 결국 정책금융기능의 비효율성이 초래될 수 있다. 또한 국책은행의 지방이전은 필수적으로 핵심인력의 유출을 동반한다. 대표적으로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의 전주 이전으로 기금운용과 관련된 주요 핵심인력들이 유출된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금융경쟁력의 핵심인 인력 유출과 이로 인한 금융서비스 및 경쟁력 저하는 그 어떤 명분으로도 보충하기 힘든 손실임에 분명하다. 그나마 지난 1차 공공기관 지방이전의 대상 금융기관들은 주요 금융과정에서 일부 서비스만 담당하는 기관들이 주류였다. 이번에 거론되는 주요 국책은행들은 ▲여수신과 주요 투자은행(IB) 업무 ▲스타트업 및 기업구조조정 금융 ▲해외투자 및 수출입금융까지 금융전반을 다루는 금융기관들이다. 그 폐해는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정부가 의도하는 주요 국책은행들의 지방이전은 앞서 소개한 지역 균형발전을 염두에 둔 ‘5극 3특’ 성장전략과 향후 막대한 투자를 동반한 메가프로젝트를 지원하기 위해 숙고한 정책적 고려로도 이해된다. 그러나 이는 앞서 소개한 금융과 금융산업에 대한 특성을 너무나 모르거나 알더라도 여러 이유로 이를 무시한 접근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자칫 섣부른 기대로 머리나 심장이 손발 따라 여러 곳으로 나뉘어지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겠다. 지금은 국책은행의 정책금융기능이 온전히 유지되면서도 현재 추진 중인 지역균형발전과 미래성장동력을 효과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정책적 혜안이 필요한 시점이다.

2026.08.02 10:00

4분 소요
도시들이 조약(條約)을 맺기 시작했다[김현아의 시티라이프]

전문가 칼럼

대한민국이 시장(市長)을 뽑기 위한 선거 열기로 달아오르던 2026년 4월, 지구 반대편 마드리드에서 글로벌 주요 도시의 시장(Mayor)들은 전혀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4월 28일, 제12회 블룸버그 시티랩(Bloomberg CityLab 2026) 정상회의. 마이클 블룸버그가 ‘메이어스 AI 포럼’(Mayors AI Forum)의 출범을 알렸다. 이 포럼은 블룸버그 자선재단과 존스홉킨스대학이 함께 만든 국제 시장(市長) 연합이다. 창립 멤버는 ▲런던 ▲도쿄 ▲마드리드 ▲보고타 ▲나이로비 ▲보스턴 ▲부에노스아이레스 ▲키이우 ▲샌안토니오 ▲샌프란시스코 등 8개국의 시장들이다. 5개 대륙, 열 개 도시. 이들이 대표하는 인구만 1억명이 넘는다. AI가 어떻게 개발되고 배치될지, 도시가 직접 그 방향을 잡아가겠다는 것이다. 시장들은 AI 개발사 경영진과의 비공개 회의에 참석하고 AI가 지역 노동시장·에너지 체계·청소년의 삶에 미칠 영향을 공동 연구하며, 검증된 활용 사례를 도시에서 도시로 옮기겠다고 선언했다.조달(調達)이라는 조용한 규칙이 시리즈의 첫 글에서 필자는 AI가 골목의 신호등과 순찰 동선을 바꾸는 현장을 들여다봤고 지난 회에서는 데이터센터라는 ‘AI의 몸’이 특정 지역에 입지할 때 그 비용을 누가 치르는지를 물었다. 그리고 “AI를 허용할 권한이 도시·중앙정부·기업 중 누구에게 있는가”를 물으며 글을 맺었다. 마드리드의 포럼은 그 질문에 도시들이 스스로 내놓은 대답처럼 보인다. 국가가 좀처럼 맺지 못하는 조약(條約)을, 도시들이 먼저 맺기 시작한 것이다.국제정치학은 도시가 국가를 거치지 않고 국제 무대에서 직접 서로와, 그리고 기업·국제기구와 관계를 맺는 활동을 ‘도시 외교’(City Diplomacy)라고 부른다. 그 대표적인 선례가 C40이다. 국가 간 기후 협상이 교착에 빠져 있던 20년 동안, 도시들이 먼저 나섰다. 메이어스 AI 포럼은 기후에서 검증된 이 문법을 이번엔 AI로 옮겨온 것이다. C40 소속 도시의 탄소 배출량이 비소속 OECD 도시보다 유의미하게 줄었다는 통계적 근거는 아직 없다. 20년간 도시들이 선언에 서명하고 사례를 공유하고 목표를 선언했지만, 구속력 없는 자발적 서약은 서명하기 쉬운 만큼 어기기도 쉬웠다. AI 포럼이 같은 한계에 빠지지 않으려면, 선언 너머의 무언가가 필요하다.서명란도 비준 절차도, 위반에 대한 강제력도 없는 시장(市長)들의 연합이 어떻게 규칙을 만든다는 것일까. 힘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뉴욕시는 2021년 자동화고용결정도구법(Local Law 144)을 제정해, 채용에 AI를 쓰는 기업에 연 1회 독립적 편향 감사(bias audit)를 의무화했다. 미국 최초의 도시 AI 규제법이다. 집행이 미진하다는 감사 결과가 나오기도 했지만, 이 법으로 말미암아 글로벌 HR 기업들이 자사의 AI 채용 도구를 '뉴욕 기준'에 맞춰 손보기 시작했다. 암스테르담과 헬싱키는 2020년 세계 최초로 AI 등록부(AI Register)를 개설해 시 행정에 쓰이는 알고리즘의 데이터셋·편향 평가·인간 감독 여부를 시민에게 공개하고 있다. 주차 단속, 불법 숙박 적발, 시민 민원 분류 등 도시가 AI를 쓰는 모든 곳에 유리벽을 세운 셈이다.도시가 AI를 구매하는 고객이자 실증 현장인 한, 도시가 내거는 조달 조건(알고리즘 투명성, 데이터 보관과 이전 기준)은 사실상의 규칙으로 굳는다. 열 개 대도시가 같은 데이터 규격과 계약 문구를 요구하면, 시장(市場)은 그 규격에 맞춰 제품을 만든다. ‘조달의 조건’이 규칙이 되는 것이다.빈 의자의 구조블룸버그 시티랩은 한국에서 아직 생소한 이름이다. 2024년 10월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제11회 시티랩에 신상진 성남시장이 한국 지자체장 최초로 공식 초청돼 저출생 대응 사례를 발표한 것이 거의 유일한 접점이다. 알려지지 않은 테이블에 의자를 놓기란 쉽지 않다. 우리나라 서울도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 규칙의 공동 설계자로서는 국제무대에 서지는 못하고 있다. 6월 지방선거라는 특수성도 있었겠지만 더 깊은 원인은 제도의 구조에 있다. 한국의 지방자치법은 지자체의 국제교류를 외국 지자체와의 교류·협력, 국제기구·행사 유치 정도로 좁게 허용한다. 독자적인 국제 규범 형성 활동에 대한 법적 근거는 불분명하다. ‘지방외교법’ 제정 논의가 학계와 시도지사협의회에서 거듭 제기되지만, 아직 없다. 중앙정부 역시 지자체의 국제활동을 국가외교의 자산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학계에서 반복된다. 1990년대 자매도시 결연에서 한 발도 나아가지 못한 한국 도시외교의 오랜 한계가, AI라는 새 의제 앞에서 다시 드러난 셈이다.이 시리즈를 쓰는 동안 필자는 AI가 도시의 신호등을 바꾸고 감시의 경계를 흐리며, 데이터센터라는 21세기의 굴뚝을 골목에 세우는 풍경을 따라왔다. 그 모든 현장에서 되풀이된 질문은 하나였다. ‘기술이 내려앉는 곳의 사람들은 그 기술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는가’. 마드리드의 테이블은 그 말을 하는 자리였다. 표준을 지켜야 하는 처지와 표준을 정하는 자리는 다르다. 규칙은 정하는 자리에 참석한 자들이 쓴다. 이제 한국 도시들도 그 테이블에 의자를 놓아야 한다.

2026.08.02 09:00

4분 소요
팔아야 하나 버텨야 하나…'롤러코스피' 대처법

전문가 칼럼

불과 얼마 전까지 시장은 ‘코스피 1만 시대’를 이야기했다.인공지능(AI) 혁명과 반도체 슈퍼사이클, 기업 밸류업, 외국인 자금 유입이 맞물리면 한국 증시가 만년 저평가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장밋빛 기대가 넘쳐났다. 코스피 5000은 종착지가 아니라 1만으로 가는 중간 기착지로 여겨졌다.그러나 가파른 상승으로 누적된 가격 부담 위에 미국의 금리 불확실성과 미·중 갈등, 글로벌 기술주 조정, 반도체 고점 논란, 이란전쟁 장기화 등이 한꺼번에 덮치자 시장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정부는 증시 부양과 자본시장 선진화를 혼동해 기름을 부었다. 단일종목 레버리지 상장지수상품 도입이 대표적이다. 정부는 해외로 빠져나가는 투자 수요를 국내 시장으로 돌리고 투자자의 선택권을 넓히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하지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처럼 변동성이 큰 종목에 일일 수익률의 두 배를 추종하는 상품까지 얹자 시장의 진폭은 더욱 커졌다. ‘롤러코스피’에 지친 투자자들은 국내에 머무르기는커녕 오히려 해외 증시로 빠져나갔다.레버리지 상품은 주가가 오르면 기초자산을 더 사고, 내리면 더 파는 방식으로 매일 포지션을 조정한다. 시장이 안정적일 때는 충격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급락장에서는 리밸런싱 매도와 신용거래 반대매매가 같은 방향으로 겹친다. 작은 불씨가 산불로 번질 수 있는 구조다.사후 대책도 미흡하다. 예탁금 기준을 높이고 투자자 교육 시간을 늘리는 식으로 입구만 좁혀서는 시장의 변동성을 줄이기 어렵다.변동성이 일정 수준을 넘으면 신규 매수와 설정을 자동으로 제한해야 한다. 신용융자와 레버리지 ETF를 결합한 사실상의 ‘이중 레버리지’도 차단할 필요가 있다.한국 증시 저평가 문제는 정치 구호와 금융 상품 몇 개로 해결되지 않는다. 기업 실적 개선과 지배구조 투명성 제고, 예측 가능한 주주환원 등 증시의 기초체력부터 다져야 한다.장기 투자자에게 세제 혜택을 주고, 연기금과 퇴직연금이 국내 우량주를 오래 보유할 수 있도록 운용 구조를 바꾸는 일도 필요하다. 단기 거래량을 늘리는 정책이 아니라 장기 자금을 시장에 머물게 하는 정책이 진짜 증시 부양책이다.한국 증시의 상승 동력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AI 혁명이 불러온 반도체 슈퍼 사이클은 끝나지 않았다.SK하이닉스가 보여준 고대역폭메모리(HBM)의 경쟁력과 삼성전자의 2분기 실적이 이를 방증한다. 최근의 급락이 AI 산업의 붕괴가 아니라 과도한 기대와 수급 불안이 겹친 조정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중국의 추격은 분명 위협적이다. 막대한 내수시장과 정부 지원, 빠른 기술 흡수력을 앞세워 메모리와 AI 반도체 분야에서 무서운 속도로 따라오고 있다.그러나 첨단 공정의 수율과 HBM 양산 경험, 글로벌 고객사와의 신뢰, 장비·설계 생태계에서는 여전히 격차가 크다. 미국의 첨단 장비·기술 통제로 세계 시장 확장에도 제약이 따른다. 중국이 강력한 경쟁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당장 K-반도체를 대체할 대항마가 되기에는 기술 격차와 확장성에서 한계가 뚜렷하다.결국 코스피가 다시 1만을 향할 수 있느냐는 질문의 답은 두 갈래에 있다.정부는 투기적 수요를 자극하는 부양책 대신 시장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장기 투자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투자자는 지수의 하루 등락이 아니라 AI혁명이 계속 될 지, 한국 기업의 이익 창출력이 살아 있는지를 봐야 한다.폭락장은 누구에게나 공포스럽다. 하지만 공포에 팔고 환호에 사는 투자를 반복해서는 ‘벼락거지’가 될 뿐이다.급등과 급락에 흔들리지 않는 뚝심. 결국 ‘존버’가 이긴다.

2026.08.01 09:23

3분 소요
루피아 무너지는데 '세금 0%' 금융특구 만든다는 인니 [동남아시아 투자 나침반]

전문가 칼럼

이번에는 최근 논란이 거세지고 있는 인도네시아로 눈을 돌려보려 한다. 아세안 GDP의 3분의 1, 인구 2억 8000만의 시장이다. 그러나 올해 상반기 이 나라에서 벌어진 일은 '성장 스토리'로는 설명되지 않는다.루피아는 지난 6월 달러당 1만8000루피아 선을 넘어서며 사상 최저권으로 밀렸다. 5월 초 심리적 마지노선이던 1만7400선이 무너진 지 불과 두 달 만이다. 외국인은 올해 들어 인도네시아 주식을 약 39억달러(5.9조원) 순매도했고, 자카르타종합지수는 한때 30% 가까이 빠졌다. 4월 외환보유액은 1462억달러(219조원)로 2년 만의 최저치다. 루피아를 방어하느라 달러를 쏟아부은 결과다. 피치는 국가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낮췄다.원인은 복합적이다. ▲경상수지 적자 ▲유가 보조금 부담 ▲통화량 증가가 한꺼번에 겹쳤다. 강달러는 방아쇠였을 뿐, 총알은 안에 장전돼 있었다. 신용등급이 실제로 강등되면 조달금리가 오르고 통화가치가 더 밀리는 악순환에 들어선다.불씨는 무상급식(MBG)이었다. 학생과 영유아, 임산부 등 최대 8300만 명에게 매일 한 끼를 제공하겠다는 공약에 정부는 올해 335조 루피아(28조원)를 배정했다. 감당이 되지 않자 5월 268조 루피아(22조원)로 줄였지만, 삭감 후에도 국가 예산의 약 7%나 차지한다. 인프라와 보건 예산을 웃도는 규모다. 여기에 무상급식이 시작된 이후 식중독으로 1만6000여 명이 피해를 봤고, 지난 6월에는 국가영양청장이 급식 예산 비리로 체포됐다. 1분기 재정적자는 전년의 두 배 가까이 늘며 법정 상한인 GDP 대비 3% 룰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자카르타 대학가에서는 “나라가 파산으로 간다”는 구호가 나왔다. 재정 규율이 흔들리자 통화가 흔들렸고, 통화가 흔들리자 자본이 움직였다.돈이 떠나는 진짜 이유는 환율이 아니다씨티그룹·스탠다드차타드·HSBC의 인도네시아 법인은 지난 2년간 6억 4000만달러 (9600억원)를 본사로 송금했다. 같은 기간 순이익을 웃도는 규모다. 번 돈을 현지에 재투자하지 않고 빼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배경에는 프라보워 정부의 국가 주도 경제가 있다. 지난해 출범한 국부펀드 다난타라는 수백 개 국영기업을 관리하며 9000억달러(1350조원) 규모 자산을 굴린다. 다난타라가 100억달러(15조원) 대출을 조달하며 10개 은행에 참여를 요청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경계심은 더 커졌다. 투자자가 두려워하는 것은 낮은 성장률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규칙이다. 성장률이 낮으면 밸류에이션을 낮추면 되지만, 규칙이 흔들리면 계산 자체가 불가능해진다.이미 투자한 기업들의 선택도 갈린다. 배당으로 이익을 앞당겨 회수하는 곳, 증설을 미루는 곳, 지분을 현지 파트너에게 넘기고 라이선스 계약으로 돌아서는 곳이 동시에 나타난다. 철수라는 단어를 쓰지 않을 뿐, 자본은 이미 조용히 짐을 싸고 있다.규제도 같은 방향이다. ▲국산부품사용비중(TKDN) ▲국가표준(SNI) ▲할랄 인증 의무화 등이 순차적으로 강화됐다. 부족한 세수 확보와 더불어 자원 수출국에서 제조업 국가로 올라서겠다는 방향은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속도다. 투자를 결정한 뒤에 규칙이 바뀌면 산업정책이 아니라 리스크가 된다. 기후 변수도 얹혔다. 인도네시아 국가연구혁신원(BRIN)은 ‘고질라 엘니뇨’가 4월부터 본격화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자바 북부 판투라 곡창지대가 타격을 받으면 쌀 수급과 물가가 흔들리고, 이는 다시 최저임금 인상 압력과 보조금 지출로 이어진다. 환율 방어에 쓸 여력을 또 한 번 갉아먹는 구조다. 농산물과 에너지 비중이 큰 업종은 하반기 가격 시나리오를 지금부터 다시 짜야 한다.인도네시아 의회는 발리를 유력 후보지로 하는 국제금융센터(IIFC) 설립 법안을 논의 중이다. ▲입주 기업 법인세 100% 감면 ▲외국 금융 전문가 소득세 사실상 0% ▲골든 비자 취득자의 비거주자 지위 ▲배당·투자수익 원천징수세 면제까지 담겼다. 혜택 기간을 최대 50년으로 하는 안도 나왔다. 목표는 60억달러(9조원) 유치, 싱가포르·홍콩·두바이를 정면으로 겨냥한 카드다.그러나 자본은 세율만 보고 움직이지 않는다. 싱가포르가 가진 것은 낮은 세금이 아니라 30년간 바뀌지 않은 규칙과 법원, 송금의 자유다. 한쪽에서 국가가 시장을 밀어내고 다른 쪽에서 0%를 제시하는 것은, 자물쇠를 잠그면서 열쇠를 파는 일에 가깝다. 한국 기업은 무엇을 할 것인가첫째, 환리스크는 손익이 아니라 자본구조에서 풀어야 한다. 루피아 매출에 루피아 부채를 매칭하고 현지 조달 비중을 높이는 편이 헤지보다 싸다. 둘째, 규제를 비용으로만 보지 말자. TKDN과 SNI, 할랄은 선제 대응한 기업에는 후발 경쟁자를 막는 장벽이 된다. 셋째, 다난타라와 국영기업이 경제의 관문이 된 이상 파트너십 구조 설계가 인허가보다 중요해졌다. 넷째, 발리 금융특구는 법안 통과와 시행령을 확인하기 전까지 ‘검토’의 영역에 두는 편이 낫다.인도네시아는 지금 어렵다. 그러나 위기는 늘 진입 가격을 낮추고, 2억8000만 명은 어디로 가지 않는다. 오늘도 인도네시아에서 환율표를 들여다보며 버티는 한국 기업들이 몇 년 뒤 가장 좋은 자리에 서 있기를 바란다.

2026.07.2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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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지수 하단의 상승, 쉽게 볼 일 아니다 [홍춘욱의 경제프리즘]

증권 일반

흔히 ‘공포지수’로 불리는 시카고옵션거래소 변동성지수(VIX)는 시장이 앞으로 예상하는 변동성을 반영한 지표로, 주식시장에서 일종의 ‘보험료’에 비유된다. 주식 투자자들은 시장이 갑자기 폭락할 때를 대비해 풋옵션을 매수한다. 풋옵션은 증시가 약세를 보일 때 가격이 상승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어, 주가 하락에 대비한 ‘보험’을 드는 효과를 가질 수 있다. 시장에 대한 불안감이 더욱 높아지면 위험을 피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옵션 가격에 반영된 내재 변동성인 VIX도 높아진다. 반대로 시장이 안정을 되찾으면 옵션을 통한 위험 회피 수요가 줄어들고 VIX도 하락한다.평온한 시장? 쌓이고 있는 리스크 첨부된 ‘그래프’는 이런 관계를 잘 보여준다. 2025년 4월 트럼프 대통령이 주요 교역상대국에 상호관세를 부과할 때 VIX가 40을 넘기기도 했으나, 평상시에는 보통 10에서 20 사이를 오간다. VIX는 항상 등락을 반복하지만, 최근 몇 년간의 흐름을 보면 ‘가장 낮게 내려가는 바닥(하한선)’이 조금씩 위로 올라오고 있다.이는 ‘휴식기 심박수’가 높아진 것에 비유할 수 있다. 푹 쉬고 있을 때의 심박수가 높아졌다면 몸에 어떤 변화가 생겼음을 짐작할 수 있듯, 시장 역시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증시가 가장 평온할 때 VIX가 10 근처에서 움직였지만, 최근에는 시장이 사상 최고가를 경신하며 호조를 보일 때도 VIX가 15 밑으로 잘 내려가지 않는다. 이는 시장이 가장 조용한 순간조차 밑바닥에는 잠재적 불안감이 깔려 있음을 뜻한다.VIX의 바닥이 올라간 원인은 크게 두 가지 가능성으로 요약된다. 첫 번째는 시장 구조의 변화다. 2022년 이후 이어진 고금리 환경과 함께 최근 레버리지 상장지수펀드(ETF)와 옵션 거래가 크게 늘면서 투자은행 등의 헤지 거래도 증가했다. 이 같은 시장 구조 변화가 옵션 가격을 구조적으로 높이며 VIX의 하단을 끌어올렸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 경우라면 거시경제적 패러다임의 변화일 뿐, 시장 자체의 위기로 보기 어렵다.사실 더 주목해야 할 부분은 두 번째 요인, 즉 잠재적 긴장의 누적이다. 겉으로는 시장이 평온해 보여도 수면 아래에서 리스크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 신호일 수 있다. 과거에도 금융위기 이전 증시가 호황을 이어가던 시기에 VIX의 하단이 점차 높아졌다는 분석이 제기된 바 있다. 또 2021년에도 주가는 상승세를 이어갔지만 VIX의 하한선은 평소보다 높은 수준을 유지했고, 이후 2022년 고물가·고금리 충격으로 시장 변동성이 크게 확대됐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투자자들의 경계심을 보여준 사례로 해석되기도 한다.출렁이는 시장, 어떻게 대응할까물론 VIX의 바닥이 상승했다고 해서 무조건적인 폭락을 예단하고 공포에 질릴 필요는 없다. 다만 시장의 체질이 변하고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다음과 같은 전략을 세워야 한다.무엇보다 ‘저변동성의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앞으로는 시장이 예전보다 더 자주, 더 크게 출렁일 수 있으므로 이를 비정상적인 위기가 아닌 일상적인 환경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변동성이 확대되는 환경에서는 과도한 부채(빚투)나 특정 자산에 대한 집중 투자는 작은 충격에도 치명적인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 충격을 견디고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자산의 일정 부분은 현금으로 보유하는 것이 유리하다. 마지막으로 VIX 하나만 보고 포트폴리오를 급격히 변경하는 것은 위험하다. 진정한 위기 신호는 VIX의 상승과 더불어 금리 급등이나 여타 불안 신호들이 동시에 들썩일 때 발생한다.최근 VIX의 바닥권이 높아진 현상은 시장이 호황 속에서도 긴장을 완전히 풀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다시 말해 주가는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지만, 옵션시장에서는 여전히 위험에 대비하려는 움직임이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는 셈이다.투자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자산을 지키며 견딜 수 있는 체력을 마련해 두는 것이다.홍춘욱 프리즘투자자문 대표

2026.07.2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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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를 가져와도 예술일까…차용미술과 저작권의 경계 [백세희의 컬처&로(LAW)]

전문가 칼럼

차용미술(appropriation art)은 실제 사물 혹은 기존 예술품의 소재를 자기 작품 안에 들여오는 창작 행위이다. 포스트모던 미술의 한 형태로 널리 이용되고 있는데, 쉽게 말해 다른 사람 작품을 내 작품에 이용하는 예술 형태다.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었으니 완전히 새로운 개념도 아니다. 그 이전에도 있었다.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 Mona Lisa>(1503~1505)는 전 세계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그림 중 하나다. 이 작품은 400년이 흐른 뒤 마르셀 뒤샹의 (1919)에서 차용되었고, 살바도르 달리의 (1954), 앤디 워홀의 (1963) 등으로 재차용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어딘가의 미술작가들에 의해 차용되고 있을지 모른다.왜 이런 차용이 이루어지는 것일까. 현대미술에서의 차용은 기존의 미술사조, 즉 모더니즘이 강조했던 자율성과 독창성의 강박에서 벗어나는 데 있다. 산업은 이미 대량 생산 체제에 들어섰는데 미술이라는 것은 아직도 독창적이고 순수한 것을 가치로 삼고 있으니, 이에 대한 강력한 도전으로 등장했다고 한다. 이런 설명도 깨나 구닥다리 해설이다. 요즘엔 하나의 문화 권력이 되어 버린 작가와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미술 시장을 비판하기 위한 차용도 종종 보인다.본질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저작권 등 침해 가능성 차용미술은 전용미술, 도용미술 또는 전유미술로 번역하기도 한다. 이 중 ‘도용미술’이라는 표현은 다분히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명칭이야 어떻든, 이미 존재하는 작품 이미지의 상당 부분을 이용하면 표절 시비가 생길 수 있다. 그런데 몰래 숨기고 베끼는 표절과는 달리, 차용미술의 경우에는 대놓고 유명한 작품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흔히 말하는 오마주 또는 패러디에 가깝다.이러한 속성에서 차용미술은 필연적으로 차용의 대상이 되는 미술품(원작)의 전부 또는 일부가 새로운 작품(차용미술품)에 이용될 수밖에 없다. 저작권침해의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저작재산권 중 복제권, 전송권 및 2차적저작물작성권의 침해가 문제된다. 원작을 비틀어 변형하기 때문에 저작인격권의 하나인 동일성유지권 침해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 외에 상표법, 부정경쟁방지법 위반 문제도 애매하게 걸쳐질 수 있다. 미국에서는 분쟁 빈번, 제프 쿤스의 재판이 대표적차용미술에 있어 원작가와 차용미술가 사이의 분쟁은 미국에서 빈번하다. 현대미술의 슈퍼스타들이 모이는 큰 시장이라 그런 것 같다. 대부분은 제소 전 화해로 마무리되지만 몇몇 사건들은 끝내 법원의 판단을 받기도 한다. 특히 제프 쿤스는 여러 차례 제소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Rosers v. Koons(1992)사건이다. 소송에 휘말린 작품은 남녀 한 쌍이 강아지 여덟 마리를 끌어안고 있는 <강아지 대열 String of Puppies>라는 제목의 조각 작품이다. 쿤스는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던 그림 카드에 인쇄된 사진작가 아트 로저의 <강아지들 Puppies>이라는 흑백사진 이미지를 차용해 작품을 만들었다. 쿤스는 로저의 저작권이 명시된 카드 뒷면은 찢어낸 후에 이를 이탈리아의 공예가들에게 보내 사진의 이미지대로 조각 작품을 만들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재판은 어떻게 되었을까? 쿤스는 작품의 의도가 현대 사회에서의 상품의 대량생산과 미디어 이미지들의 난립을 비판하기 위한 패러디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이런 형태의 미술 창작 방식은 이미 매우 일반적이라고도 주장했다. 사진을 조각으로 즉 매체를 아예 바꾸었으며, 흑백 사진을 컬러 조각으로 채색하였고, 자세히 살펴보면 사진에는 없는 데이지 꽃을 등장시켰으므로 엄연히 다른 작품이라고도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 결과는 쿤스가 로저의 저작권을 침해한 것으로 인정되었다. 법원은 쿤스의 작품이 원작을 일부 갖다 쓴 정도가 아니라 사실상 작품 전체를 복제한 것으로 보았다. ‘공정이용’에 포섭될 수 있을 것인지가 관건국내에는 차용미술이 직접적으로 문제되어 판단된 하급심 및 대법원 판례가 현재까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타인의 저작물을 허락 없이 이용할 수 있는 일종의 면책 사항인 ‘공정이용’에 대한 법리를 이용해 분쟁을 해결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쿤스의 기여(?)로 미국에서는 그 요건과 적용례가 확립되었다. 우리나라 저작권법도 미국의 공정이용 요소를 채택하여 제35조의5에서 공정이용에 관한 일반 조항을 두고 있다. 공정이용은 타인의 저작물을 일정 요건 아래 동의 없이 이용할 수 있는 법리이다. 하지만 그 요건을 만족하는 것은 까다로운 편이다. 이용의 목적 및 성격, 저작물의 종류 및 용도, 이용된 부분이 저작물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그 중요성, 저작물의 이용이 그 저작물의 현재 시장 또는 가치나 잠재적인 시정 또는 가치에 미치는 영향을 모두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하여야 한다.예술의 영역에서 이런 요소들을 객관적으로 판단해 낸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몇 퍼센트를 갖다 쓰면 그때부터 침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정량적인 문제도 아니고, 미술계에서 인정받은 차용작품의 예술성이 과연 민사재판에서도 고려될 수 있는 요소인지도 애매한 문제다. 그런 측면에서 향후 차용미술의 공정이용에 대해 우리 법원의 판단이 나온다면 꽤나 흥미로운 일이 될 것 같다. 단, 이런 판단으로 예술가들끼리 분쟁이 없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백세희 법률사무소 아트앤 대표변호사

2026.07.1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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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가에게도 ‘노오오력’만 요구할 것인가 [최화준의 스타트업 인사이트]

전문가 칼럼

국가대표 축구팀이 2026년 북중미월드컵에서 탈락한 후폭풍이 거세다. 국민들은 축구협회와 리더가 이번 월드컵을 준비하면서 보여준 과정에 크게 분노하고 있다. 교육 기관에서 창업을 가르치는 필자에게 이번 월드컵의 준비 과정과 국민들의 분노는 특별한 의미로 해석된다. 이번 사건은 잘못된 사회 시스템과 불신이 자리잡은 제도가 어떻게 개별 구성원을 망가뜨리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기성 세대는 말한다. 젊은 세대의 노력이 부족해 성취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젊은 세대는 ‘노오오력’(노력만으로는 현실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청년들의 자조적인 의미를 담은 신조어)으로 안되는 일도 많다고 항변한다. 항변의 이면에는 불공정한 사회에 대한 분노가 있다. 적어도 이번 국가 대표팀을 둘러싼 일련의 사건은 젊은 세대들의 주장이 옳았음을 보여준다. 축구 선수들은 4년에 한 번 열리는 월드컵 출전을 평생의 꿈으로 여긴다. 그들의 노력이 부족했을리 만무하다. 하지만 어른들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만든 제도와 시스템 속에서 선수들의 꿈은 손쉽게 아스러졌다. 어른들은 높은 자리에서 다음 월드컵 경기를 감상할 기회가 있겠지만, 선수들 대부분은 다음 월드컵에서 피치를 밟을 수 있는 기회를 기약하지 못한다. ‘벤처투자 계약문화 발전 선포식’-창업자 포용 시도 보여줘이번 국가 대표 선수들을 바라보면서 필자는 비슷한 연령대의 수많은 창업자들이 떠올랐다. 우리 사회는 청년 창업을 권장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권리 보호에 우리 사회가 운영하는 시스템은 그만큼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스타트업 생태계를 연구하면서 청년 창업자들을 만나 인터뷰 할 기회가 많다. 이야기는 중 한 꼭지는 항상 그들의 하소연이다. ▲대기업의 기술 탈취 피해 ▲투자자의 연대 보증 요구 ▲높은 문턱을 넘어야 하는 금융 기관의 신용 대출 ▲백방으로 뛰어다녀도 해법을 찾기 어려운 산업 규제 등은 과거부터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등장하는 고민 사항이다. 창업자들은 정부의 지원이 기업 초기에 집중되어 있는 반면 다른 성장 주기 지원에는 비교적 소홀하다고 말한다. 그들은 기업이 성장할수록 창업자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많아지는데, 이를 창업자의 노력 부족으로 바라보는 시선에 아쉬움을 나타냈다. 이런 창업 환경 속에서, 얼마 전 중소벤처기업부가 제안한 ‘벤처투자 계약문화 발전 선포식’은 우리 스타트업 생태계가 창업자를 제도적으로 포용하려는 의미있는 시도이다. 스타트업은 투자금으로 성장한다. 돈을 빌리는 창업자 입장에서는 큰 목소리를 내기 힘들다. 이런 이유로 투자자와 창업자는 갑을 관계로 이어지고, 이따금씩 창업자가 불리한 불공정 계약이 이루어지곤 한다. 정부가 이번에 제안한 벤처투자 계약문화 발전 선포식은 창업자의 권리를 회복하는 방향으로 노력한 결과로 보인다. 창업자들이 지속적으로 요구했던 부분들이 상당히 반영되었다. 동시에 북미 지역에서 통용되는 벤처투자 제도를 일부 받아들이면서 글로벌 표준에 다가간 모습이다. 과거 글로벌화를 추진하던 스타트업들에게 국내 투자 관행이 반영된 계역서는 해외 진출의 걸림돌로 작용했다. 새로운 벤처투자 계약 제도는 글로벌화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모두의 창업’ 아이디어 유출 사건, 창업자 권리 보호 실패 사례 이에 반해 최근 발생한 ‘모두의 창업’ 아이디어 유출 사건은 정부 제도가 창업자 권리 보호에 실패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정보 유출 피해자를 위해 다양한 지원책을 내놓았지만,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라는 비판을 면하기는 어렵다. 특히 ‘모두의 창업’은 기술 창업 아이디어 모집을 중심으로 진행된 만큼, 지원자들의 지적 재산권 피해는 단순히 금전적으로 환산하기 어렵다. 정부 지원 대책을 내놓았지만, 아이디어 유출 피해는 고스란히 창업자가 짊어져야 한다. 스타트업 생태계 관계자들은 이번 사건을 창업자 권리 보호에 소홀한 현실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입을 모은다. 과거 초기 스타트업 육성에 방점을 찍었던 국내 창업 지원 제도는 최근 성장주기에 있는 기업 지원에도 힘을 쏟는 모습이다. 정부를 비롯한 스타트업 생태계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연간 신규 창업 수는 100만개가 훌쩍 넘은 지 오래다. 그 동안 국내 신규 창업 기업들의 5년 창업 생존율을 30%대 초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제 창업 생존율 정체의 원인이 부족한 제도적 환경에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특히 창업자들의 성장 단계 진입을 도울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가 스케일업을 준비하고 있는 창업자들에게 조금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그들의 노력이 결코 부족하지 않고, 그리고 그들의 노력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제도적 문제들 파악하고 창업 생존율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이번 국가 대표 축구팀의 사태는 청년들에게 무작정 개인의 노력만을 강요하는 관행과 이를 묵인한 시스템에서 비롯됐다. 축구 선수들이 혼신의 노력으로 월드컵 경기 출전 기회를 잡는 것처럼, 창업자들도 모든 것을 바쳐 목표에 도달하고자 한다. 우리 창업 제도가 간섭은 하지 않되, 창업자를 보호하는 제도적 지원은 소홀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는 그동안 창업자의 능력과 노력에만 기대어 결과를 기대할 뿐, 창업자의 권리 보호에는 소홀하지 않았는지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초기 창업 수치에만 매몰될 것이 아니라, 성장 구간의 공백을 메우는 촘촘한 맞춤형 정책 실행이 시급하다. 그들의 성장을 도와줄 든든한 제도와 시스템이 필요하다. 언제까지 스타트업 생태계는 창업자들에게 노력이 아닌 ‘노오오력’을 요구할 것인가. 필자는 전남대 경영대학 교수로 창업생태계와 창업실패를 연구하고 있다. 다국적 기업과 창업생태계 현장을 모두 경험하고 연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창업생태계를 가까이 하면서 창업자들과 유연하고 창의적인 시각을 공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26.07.1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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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센터, 21세기 굴뚝 되나[김현아의 시티라이프]

전문가 칼럼

2025년 8월, 미국 애리조나주 투손시 의회는 대형 데이터센터가 신청한 시 상수도 연결을 위한 부지 편입안을 만장일치로 부결했다. ‘프로젝트 블루’(Project Blue)라고 불리는 이 사업은 아마존과 연계된 인프라 개발사 ‘빌 인프라스트럭처’가 약 36만평 부지에 지으려던 데이터센터다. 완공되면 이 시설은 해마다 약 250만톤의 물을 써, 사막 도시 투손에서 물을 가장 많이 소비하는 고객이 되는 셈이었다. 주민들은 ‘기업의 물 강탈’이라며 이 사업을 조직적으로 반대했다. 사업자는 시 경계 밖 피마 카운티의 승인을 받아 물이 거의 안 드는 공랭식으로 바꿔 재추진 중이지만, 반발은 가라앉지 않았다.투손만의 일이 아니다. 2026년 1분기에만 미국에서 주민 반대로 막히거나 미뤄진 데이터센터가 75건, 약 1300억 달러에 이른다. 집계가 시작된 2023년 이래 분기 최고치이자 2025년 한 해와 맞먹는 규모다. 올해 3월 갤럽 조사에 의하면 미국인의 71%가 자기 지역에 AI 데이터센터가 들어서는 것에 반대했다. 원자력발전소를 반대한다는 응답(53%)보다 높다. 미국인은 이제 원전보다 데이터센터를 더 꺼린다.데이터센터는 AI의 몸이다. 우리가 열광하는 두뇌(AI 모델)를 돌리려면 막대한 전기와 물과 땅을 먹는 몸이 어딘가에 서야 한다. 반대의 이유는 대부분 전기와 물이다. 댈러스 연방준비은행 분석에 따르면 기존 데이터센터는 이미 전국 도매 전기요금을 3~5% 끌어올렸고, 밀집 지역의 상승폭은 훨씬 크다. 미국은 데이터센터가 워낙 많은 전기를 빨아들이면서 그 지역 도매 전기가격이 오르고, 그렇게 오른 값은 결국 인근 주민의 요금 고지서에 반영된다. AI가 쓴 전기 값을 정작 옆에 사는 사람이 함께 떠안는 셈이다. 물도 마찬가지다. 서버를 식히느라 막대한 물을 증발시키니, 투손처럼 가문 지역일수록 두려움이 크다.일론 머스크의 xAI가 멤피스 일대에 세운 데이터센터 '콜로서스'는 전력망만으로 감당이 안 되자 부지에 가스터빈 수십 기를 허가 없이 돌렸다. 이 발전설비가 뿜을 질소산화물(NOx)은 연 1000톤을 넘어, 멤피스권 최대 산업 오염원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그 굴뚝 아래 마을이 하필 박스타운(Boxtown), 발전소·쓰레기처리장 같은 혐오시설이 대를 이어 들어선, 남멤피스의 가난한 흑인 동네였다. AI의 편익은 온 세상이 나눠 갖는데 그 매연은 왜 이 동네가 마시는가. 미국은 이런 분노가 빠르게 조직화되면서 데이터센터에 반대하는 그룹은 49개 주 833개로 한 분기 만에 두 배가 됐고, 2026년 첫 6주에만 관련 법안 300여 건이 주의회에 올랐다. 데이터센터에 세제 혜택을 안기던 미국이, 이제 규제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는 이유다.데이터센터 끌어오려는 지자체들한국은 사정이 좀 다르다. 전력 기술검토를 신청한 데이터센터의 약 70%가 수도권에 몰렸는데, 정작 수도권 신청의 절반 이상은 전력을 댈 수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수도권은 이미 곳곳이 전쟁터다. 김포 구래동에서는 주민들이 소음과 냉각수 방류에 초고압선 전자파까지 들어 반대했고, 지자체가 착공신고를 반려했다가 행정심판에서 져 공사를 재개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인허가를 받고도 첫 삽을 못 뜬 부지가 3분의 1을 넘는다. 데이터센터를 둘러싼 우려에는 근거가 분명한 것도, 아직 과학적으로 다투는 것도 있다. 그래도 공사가 멈추는 결과는 같다. 반면 지방에서는 정반대의 경쟁이 벌어진다. 2조5000억원 규모 ‘국가AI컴퓨팅센터’를 놓고 여러 지자체가 유치전을 벌였고, 지난해 전남 해남이 최종 입지로 확정됐다. 값싼 재생에너지와 넓은 부지가 결정적이었다. 정부는 비수도권 데이터센터의 전기 시설부담금을 절반으로 깎아 분산을 유도해 왔고, 2027년 시행되는 AI 데이터센터 특별법은 전력계통영향평가 특례와 재생에너지 직접공급, 데이터센터 특구까지 지방에 얹어 줄 참이다. 같은 시설을 두고 한쪽은 축출 운동이, 다른 쪽은 유치 경쟁이 붙는다. 지방 유치에는 지역 균형발전의 명분도, 산업 클러스터의 씨앗이 될 가능성도 분명하다. 문제는 그 명분에 '무엇을 얻고 무엇을 내주는가'의 계산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청구서는 누구에게 오는가도시는 늘 ‘성장의 엔진이면서 동시에 기피시설’인 입지물과 씨름해 왔다. 19세기의 공장 굴뚝, 20세기의 발전소와 소각장과 송전탑이 그랬다. 21세기의 그 자리를 데이터센터가 잇는다. 도시계획은 이런 시설을 '지역이 원치 않는 토지이용(LULU·Locally Unwanted Land Use)'이라 부른다. 편익은 전국이 나눠 갖고, 비용은 그 시설이 들어선 동네가 떠안는다. 데이터센터 반대의 뿌리가 바로 이 ‘입지의 정치’다.AI 확산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데이터센터는 앞으로도 더 많이 필요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유치냐 반대냐가 아니라, 비용은 누가 지고 편익은 누가 갖느냐다. 한국은 전기요금이 전국 단일이라, 미국처럼 옆 동네 데이터센터가 내 요금을 곧장 올리지는 않는다. 대신 다른 얼굴의 청구서가 날아온다. 늘어난 전력을 대려면 송전선과 변전소를 새로 깔아야 하는데, 그 비용을 전 국민이 분담할지 유치한 사업자가 부담할지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지방이 값싼 재생에너지와 넓은 부지, 냉각수를 내주고 무엇을 돌려받는지도 계약서에 적혀 있지 않다.미국 버지니아주는 올해 7월, 전국에서 처음으로 데이터센터가 쓰는 전력에 kWh당 1.1센트의 세금을 매겼다. 그 비용이 주민 요금으로 번지지 않도록 사업자에게 되돌리려는 실험이다. 우리도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 법을 만들어 본 사람은 안다. 구호와 조문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먼지를. 지방에 데이터센터를 '유치하라'는 구호는 요란한데, 정작 무엇을 남기게 할지는 비어 있다. (다음에 계속)

2026.07.1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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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가 헌신하지 않으면 사법정의는 실현될 수 없다 [김기동의 이슈&로(LAW)]

전문가 칼럼

“검찰청이 없어진다는데, 그럼 검사들은 무슨 일을 하게 됩니까.”요즘 사람들을 만나면 자주 받는 질문이다. 10월부터 검찰청을 폐지하고 수사는 경찰청과 중대범죄수사청이 맡는다고 하니, 검사 출신인 필자에게 하는 질문이다. 형사사법제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일반인이라면 당연히 할 수 있는 질문이다. 그래서 자세하게 설명하기도 어렵다.“검찰의 특수부와 강력부 같은 수사부서에서 하던 일이 중대범죄수사청으로 옮겨갈 뿐입니다. 검찰의 본래 기능은 그대로 남습니다.”이렇게 설명하고 넘어가지만 잘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다.검찰의 본질적 기능은 무엇일까. 국가를 대신해 형벌권을 실현하는 것이다. 범죄자에게 죄에 상응하는 형벌을 집행하고 이를 통해 범죄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가 존재한다. 이러한 국가의 존재 이유는 형사재판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그 재판을 국가를 대신해 담당하는 사람이 검사다.미국 검찰의 공소장 표지에는 ‘United States of America v. ○○○’라고 기재돼 있다. 법정에서도 검사는 ‘on behalf of the United States’ 또는 ‘representing the United States’라고 말한다. 검사가 개인 자격이 아니라 미합중국을 대표해 기소권을 행사한다는 의미다.기소 전 수사에 매몰된 ‘보완수사권 논쟁’검사가 국가를 대신해 기소했는데 무죄가 속출하면 어떻게 될까. 국가의 형사사법 시스템 자체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만약 형사소송법 개정이 치밀한 검토 없이 이뤄진다면 이런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막강한 변호인단을 갖춘 피고인과 싸우면서 유죄를 받아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새로운 증거를 수집하고 제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보완수사 활동’이다. 지금 정치권에서 벌어지고 있는 ‘보완수사권 논쟁’은 기소 전 단계에 집중되고 있다. 이는 핵심을 비껴간 것이다.미국 등 사법 선진국에서는 중요 사건의 공판 과정에 1차 수사를 맡은 사법경찰관이 참여하면서 검사를 돕는다. 무죄는 사법경찰관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인식이 확고하게 자리 잡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법경찰관은 검사의 의견을 존중하고 검사가 요청하면 추가 증거 수집에 적극적으로 나선다.수사 초기부터 재판 확정까지 형사사법 절차 전 과정에서 검사와 사법경찰관의 협력을 법적으로 뒷받침하는 것, 이것이 보완수사권 논쟁의 진짜 핵심이 돼야 한다.뉴욕남부연방검찰청이 ‘테라·루나’ 사건과 같은 중요 사건을 수사하고 공판을 수행할 때 검사가 몇 명이나 투입될까. 한 명이다. 심지어 그 검사는 다른 중요 사건도 여러 건 맡고 있다. 한국이라면 검사와 수사관 수십 명이 몇 년씩 매달려야 할 사건이다.미국에서는 어떻게 가능할까. SEC(증권거래위원회)나 FBI(연방수사국)가 검사와 한 팀을 이루면서 실제 수사를 도맡아주기 때문이다. 미국에는 특별한 법률 조항도 없는데 이런 실질적 협력이 이뤄지고 있다.우리나라에서 법률적 근거 없이 검찰과 경찰 사이에 이런 협력이 가능할까. 수사 단계에서도 핑퐁식 사건 처리가 만연해 있는데 공판 단계에서 협력이 이뤄질 리가 만무하다. 보완수사권은 권한이자 일이고 책임이다보완수사권 논쟁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대목이 있다. 수사기록만 보고 기소하면 억울한 피의자를 걸러낼 수 없다. 수사기록 검토만으로 기소 여부를 결정하게 하면 나중에 잘못된 기소로 중대한 인권침해가 발생해도 검사에게 책임을 묻기 어렵다.현재 일선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일선 수사를 담당하는 경찰관들은 "검사들에게 보완수사권을 줘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고 한다. 보완수사권은 권한인데 왜 검사에게도 주는 것이 맞다고 할까? 권한은 다른 말로 하면 일이고, 책임이기 때문이다.미국의 검사는 수사를 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사법 시스템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중요 사건에서는 검사가 대배심 절차를 통해 소환장과 영장을 발부받고 사법경찰관이나 혐의자, 증인을 불러 직접 이야기를 듣는다. 미국의 대배심 절차는 한국 검사의 대면 조사와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이다.보완수사권 논쟁이 어떤 결론에 이르든 억울한 피의자를 걸러내기 위한 이런 기능만큼은 남겨둬야 한다.그런 기능까지 없앤다면 검사에게 어떤 책임도 물을 수 없게 된다. 검사들은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 보장되겠지만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간다.지금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구속영장 청구 전 피의자 면담제도 ▲검찰시민위원회 ▲대검 수사심의위원회와 같은 제도를 실효적으로 작동시켜야 한다. 검사가 사법경찰관이나 사건 관계자들을 면담해 기소 여부를 가릴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래야만 불성실하고 무리한 사건 처리에 따른 책임을 물을 수 있다.필자가 로펌을 만든 지 4년이 조금 지났다. 그사이 우리 로펌 소속이던 우수한 변호사 세 명이 공직으로 진출했다. 인재를 놓쳐 로펌 입장에서는 손해이지만 나라를 위해서는 좋은 일이다. 두 명은 검찰로, 한 명은 금융감독원으로 갔다.여전히 우수한 법조인들이 검찰로 향하고 있다. 인재가 모이는 조직은 희망이 있다. 그러나 검사라는 자리는 고되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좌우하는 결정을 내리는 직업이 어찌 고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수사기록을 샅샅이 살피고 당사자를 직접 불러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검찰 일선에서는 검사들이 대면 조사를 기피하는 경향이 팽배해 있다. 나라를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검사들에게 사명감과 자긍심을 심어줘야 한다.법무부 장관의 지시로 한국 검사들도 재판을 시작하기 전에 이렇게 말하도록 하면 좋겠다.“저는 ○○○ 검사입니다. 저는 대한민국을 대리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검사가 자신의 일에 헌신해야 사법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 그래야 국민이 범죄로부터 보호받고 편안해진다.김기동 법무법인 로백스 대표변호사

2026.07.1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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