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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유명 병원들도 거절했다…‘1경 시장’에 장흥이 뛰어든 이유 [길에서 만난 사람들]

전문가 칼럼

“약초는 시장에서 파는 원물이 아녀. 기나긴 인고를 견뎌갖고 대지가 품은 기운을 사람한테 고스란히 전해주는 가장 정직한 메신저지.”서울 광화문을 출발해 정남(正南)으로 한참을 내달려야 닿는 전남 장흥. 춘분(春分)의 훈풍이 내려앉은 장흥읍 ‘장흥힐링테라피센터’의 문을 열면, 코끝을 찌르는 진한 생약초 향기가 방문객을 압도한다. 단순히 향기롭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도심의 경쟁 속을 버텨온 이들이 이곳의 공기와 마주하는 순간, 뇌와 몸의 긴장은 일순간 무장 해제된다.이 변화의 중심에는 십수 년 지기 고향 친구인 배권세 장흥군신활력플러스 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과 설승환 원광대 장흥통합의료병원 사무국장이 있다. 두 사람은 각자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장흥의 생약초와 의료 인프라를 결합해, 시골 마을의 자원을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미쳤다” 소리 들으며 8년...잡초를 브랜드로 만든 집념장흥은 예부터 생약초 특구였으나, 그동안은 단순히 원물을 수확해 판매하는 1차 산업의 한계에 갇혀 있었다. 배권세 이사장은 이를 서비스와 결합한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전환하는 데 사업의 성패를 걸었다.“원물(原物) 판매라는 1차 산업의 굴레에선 미래가 없었제. 매년 7.6%씩 쑥쑥 크는 글로벌 웰니스 시장의 핵심은 ‘서사’라니깐. 도시 사람들이 바라는 거는 약초 자체가 아니여. 그 약초가 내 몸에 닿아갖고 일으키는 ‘회복의 드라마’지.” 배 이사장은 시스템 구축에만 7년 6개월을 쏟았다. 당시의 막막함을 그는 투박한 말투로 회상한다. “처음엔 다들 미쳤다고 했소. 돈도 안 되는 풀뿌리 잡고 뭐 하냐고. 근데 우리 약초가 향기로 터져 나와 사람을 살리는 꼴을 꼭 보고 싶었응께 그랬제.”그는 외부 전문가 대신 지역 주민 35명을 직접 선발해 8년간 정예 테라피스트로 양성했다. 장흥 자생 약초로 만든 13종의 화장품 브랜드 ‘이로우미(Iroumi)’는 그와 주민들이 함께 빚은 인고의 산물이다. 센터 3층 테라피실에서 5만 원대부터 시작하는 아로마 패키지를 경험해 보면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장흥의 흙이 키운 약초 오일이 숙련된 테라피스트의 손길을 타고 전신에 퍼지는 순간, 8년의 세월이 응축된 향기가 몸 안의 독소를 밀어내는 듯한 감각이 전해진다.영하 110도에서 만나는 ‘완벽한 리셋’테라피센터에서 향기로 몸을 달랬다면, 차로 20여분 거리에 있는 장흥통합의료병원 2층 ‘전라남도 마음건강치유센터’는 그 치유에 의학적 신뢰를 부여한다. 이곳은 2025년 우수웰니스관광지로 선정되며 한국형 메디웰니스(Medi-Wellness)의 표준을 제시했다.설승환 사무국장은 양방·한방·대체의학을 결합한 ‘통합의학’을 웰니스 상품으로 정교하게 설계했다. “수도권 병원들은 수익이 안 나네, 너무 머네 해싸면서 손사래를 쳤제. 그란디 우리 장흥은 요 천혜의 자연 자본을 의학적 처방으로 딱 엮어볼 용기를 낸 거여.” 설 국장은 설립 당시의 절박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서울에 유명하다는 대학병원은 다 찾아다녔제. 근데 다들 ‘너무 멀어서 수익 안 난다’고 손사래를 칩디다. 가슴이 타들어 갔는디, 그때 친구 배 이사장이랑 소주 한잔하면서 ‘우리 자존심 한번 세워보자’고 결심했소.”이곳의 강점은 ‘과학적 데이터’다. 맥파 검사와 스트레스 지수 측정 등 정밀 진단을 통해 내 몸의 피로도를 시각화된 그래프로 직면하게 한다. 특히 영하 110도의 극저온 전신 자극 장비인 ‘크라이오테라피 챔버’는 짧은 시간에 ‘완벽한 리셋’을 원하는 비즈니스맨들에게 독보적인 인기다. 3분간의 극한 체험 후 혈관이 팽창하며 몸속에 엔도르핀이 도는 그 짜릿한 감각은, 도심의 어떤 스파도 흉내 낼 수 없는 강력한 회복력을 제공한다. 주말과 공휴일을 제외하고 예약제로 운영되는 이곳은 하루 단 3팀에게만 문을 열어 최상의 몰입도를 보장한다. 입안에서 터지는 자연의 복원력장흥의 웰니스 비즈니스는 식탁 위에서도 완성된다. 장흥의 대표 특산물인 ‘무산(無酸)김’은 효율성 대신 정직함을 택해 성공한 사례다. 염산을 쓰지 않고 김발을 매일 뒤집어 공기 중에 노출하는 전통 방식은 생산 과정은 까다롭지만 프리미엄 시장에서 독보적인 신뢰를 얻고 있다.여기에 지역 쌀을 활용한 ‘쌀빵’은 농업 자산을 현대적 푸드테크(Food-tech)로 확장해 소화가 편안한 기능성 식품 시장을 공략한다. 배 이사장은 “정직한 식재료가 바로 우리 지역 산업 경쟁력이여. 장흥 갯벌이랑 산이 정성껏 키운 식재료를 테라피랑 딱 묶어갖고 패키지로 내논께 지역 경제 전반에 활기가 도는 거제.”라고 설명했다. 힐링테라피센터 1층 갤러리와 북카페에서는 누구나 장흥의 쌀과 김으로 만든 웰니스 푸드를 가볍게 체험할 수 있어, 관광객들의 소비를 지역 경제로 직접 연결하고 있다.정부가 전국 7개 권역을 웰니스 클러스터로 육성하며 160억 원의 예산을 투입하는 등 정책적 지원을 확대하는 가운데, 장흥은 이미 미식과 의료, 테라피가 결합한 독자적인 산업 생태계를 구축했다.장흥의 성공은 시골 마을이 가진 보편적인 자원을 어떻게 전문적인 서비스 산업으로 승화시키느냐에 달려 있었다. 길 위에서 만난 두 친구는 자연에 순응하며 저마다의 치유 서사를 써 내려가고 있었다. “사람이 곧 자연입디다. 편백숲 우드랜드 펜션에서 하룻밤 묵고, 다도해가 한눈에 들어오는 장흥126타워에 올라가 보시오. 자연으로 돌아와 깊은숨을 한번 크게 쉬어 보는 거, 그것이 장흥이 제안하는 진짜 여행이자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복원’이라니깐요.” 고향의 자원을 산업화하겠다는 두 주역의 안목과 실행력은 지역 소멸을 고민하는 대한민국 지자체들에 새로운 성공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2026.03.22 09:00

4분 소요
위기의 경제, 버팀목 기업에 숨통 틔워줄 때 [EDITOR’S LETTER]

전문가 칼럼

라면과 식용유 업체들이 오는 4월부터 일부 제품 가격을 인하하기로 했습니다. 라면의 경우에는 평균 4.6~14.6% 내리는데, 출고가 기준으로는 40~100원 가량입니다. 식용유 제품은 평균 3~6% 가량으로 출고가 기준 300원에서 최대 1250원까지 내리는 겁니다. 일부에서 인기 제품은 제외됐다는 비판이 있긴 하지만 내수 부진에 더해 미국과 이란 전쟁으로 인한 고유가·고환율 등 혼돈의 국내외 경제 여건에서 ‘가격 인하’라는 결정은 기업으로서는 쉽지 않습니다. 유통업계 임원은 “정부의 물가 안정 요청에 기업들이 적극 협조하는 것이지, 여력이 있어서 가격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며 어려움을 토로했습니다.기업은 지금 복합 위기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중동 전쟁으로 유가가 오르면서 원·달러 환율이 1500원 선을 쉽게 넘고 있는데요, 지난 3월 16일(1501.0원)에는 금융위기 당시인 2009년 3월 12일 이후 처음으로 주간 거래에서 장중에 1500원을 넘었습니다. 정부는 어떻게든 1500원 선 아래로 환율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중동 전쟁’이라는 대형 악재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내 기업들 대부분이 원자재를 수입에 의존하는 구조인 만큼 고환율은 곧바로 비용 상승으로 이어집니다. 여기에 유가 상승까지 겹치면서 가격 인상 압력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격을 인하한 것은 기업 입장에서는 상당한 부담을 감수한 결정입니다. 이를 잘 아는 이재명 대통령은 “이런 변화의 시기에 상품 가격을 내리는 경우는 거의 처음 아닌가 싶다. 위기 극복에 동참해 준 기업들에 감사 인사를 드린다”며 고마움을 표시했습니다. 문제는 미국과 이란 전쟁이 장기전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 지도부를 잇따라 제거하고 있고, 이란은 보복을 외치고 있어 이번 전쟁이 쉽게 끝나지 않을 수 있다는 전망에 힘이 실립니다. 이러면 1970년대 석유 공급 부족과 유가 급등으로 세계 경제가 위기를 맞은 ‘석유 파동’이 현실화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경고했습니다. 이는 경제 여건이 점점 나빠진다는 얘기여서 정부가 기업에만 기대어 문제를 헤쳐 나갈 상황이 아닙니다. 또 다른 업체 임원은 “국가적 위기에는 모두가 함께해야 하는 건 당연하다”라면서도 “다만 산업용 전기요금 인하나 법인세 부담 완화 등 최소한의 정책적 지원이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기업들은 어느 때보다 정부의 정책 지원과 규제 완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 관련한 논의나 준비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에 이재명 정부 들어 자사주 소각을 의무화한 상법 개정, 하도급 노동자에 대한 원청 책임을 강화하는 노란봉투법 등 기업을 옥죄는 규제는 빠르게 강화하는 반면, 배임죄 폐지와 상속세 개편 등 기업들이 요구해 온 규제 완화는 지지부진한 상태여서 기업들은 답답해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평상시가 아닌 비상 국면입니다. 세밀한 이해득실을 따지기보다 위기 대응에 정책 역량을 집중해야 할 시점입니다.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K-기업들이 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해왔다는 점을 감안할 때, 정부의 보다 과감하고 실질적인 기업 지원이 절실한 시점입니다.

2026.03.22 06:00

2분 소요
투자사가 스타트업의 '경영 실패' 책임을 묻는 게 맞을까 [최화준의 스타트업 인사이트]

전문가 칼럼

새해 스타트업 생태계에는 창업 의욕을 꺾는 안타까운 소식이 잇달아 날아들었다. 첫 번째 소식은 투자자인 신한캐피탈을 상대로 한 3D 공간 데이터 플랫폼 스타트업 어반베이스의 항소심 패소다. 2023년 사업 악화로 회생 절차를 밟던 어반베이스에 대해, 신한캐피탈은 하진우 대표 개인에게 연대 책임을 물어 소송을 제기했다. 신한캐피탈은 투자 주체가 벤처캐피털(VC)이 아닌 신기술사업금융사라는 점과, 연대 책임 청구가 아닌 ‘주식매수청구권’을 계약 근거로 내세워 1심과 2심에서 모두 승소했다.투자사-창업자 간 위험 공유 원칙 깨지나창업자들을 중심으로 한 스타트업 생태계는 이번 판결에 큰 우려를 표명했다. 투자사가 피투자 기업 창업자 개인에게 기업 위기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고 있다. 이는 사실상 과거의 악습인 연대 책임과 다를 바 없는 전례 없는 사례다.본래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창업자는 투자 유치를 통해 위험을 분산하고, 투자사는 투자를 통해 그 위험을 떠안는 협업 방식이 상식으로 통용되어 왔다. 이를 통해 벤처 금융과 스타트업은 위험을 공유하는 파트너십을 구축했다. 그러나 이번 소송은 투자사가 창업자에게 사실상 원금과 이자를 청구한 셈이어서,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양측의 신뢰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는 평가가 나온다.두 번째 소식은 부동산 조각 투자 플랫폼 루센트블록의 장외거래소 인가 심사 탈락이다. 2018년 설립된 루센트블록은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우량 부동산에 소액 투자가 가능한 토큰 거래 시장을 개척해 왔다.문제는 올해 초 장외거래소 예비 인가 심사에서 루센트블록은 고배를 마신 반면, 한국거래소(KRX)와 넥스트레이드(NXT) 같은 대형 기관들이 선정되었다는 점이다. 루센트블록은 2021년 ‘혁신금융서비스(규제 샌드박스)’ 기업으로 지정된 이후 불모지였던 시장을 일궈왔다. 오랫동안 시장을 개척하고 사업성을 실증한 혁신 기업은 탈락하고, 시장을 관망하던 대형 기관들이 그 열매를 가져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과거 제도권 금융 기관들은 법적 규제와 해석이 모호하다는 이유로 토큰 시장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지 않았다. 당시 시장을 만들고 혁신을 이끈 이들은 핀테크 스타트업 창업자들이었다. 그들은 입법 기관을 설득하고 행정 기관에 호소하며 길을 닦았다. 정작 인가 심사에서는 시장 밖에서 관망하던 기관들만 통과했으니, 심사 공정성 논란이 불거지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다. 법과 제도 아닌 ‘창업 문화’라는 관점 필요 어반베이스에 승소한 신한캐피탈과 인가 심사를 통과한 대형 기관들은 모두 법적으로나 절차상 문제가 없으며 정당한 결과라고 주장한다.필자의 심정은 복잡하다. 법적 결함이 없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이것이 ‘정당한 결과’라는 주장에는 수긍하기 어렵다. 신한캐피탈이 어반베이스의 스타트업 특성을 몰랐을 리 없다. 연대 책임을 묻지 않는 벤처 금융의 본질 또한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이다.루센트블록 사례도 마찬가지다. 인가 심사 기관이 기존 제도권 금융의 잣대가 블록체인 기반 혁신 사업 심사에 적합하다고 믿었는지 의문이다. 전문가들은 금융 시장의 낡은 기준으로 혁신 기술 사업을 측정한 것부터가 오류라고 지적한다. 일각에서는 이번 사태를 두고 금융 관료들의 ‘짬짜미’ 심사라는 혹독한 비판까지 내놓고 있다.법은 허점이 있을 수 있고, 제도는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 법이 ‘최소한의 도덕’이듯, 제도는 사회 구성원이 합의한 인식과 문화라는 토대 위에서 명문화되어야 한다.창업 영역도 마찬가지다. 투자자와 창업자가 위험을 공유하는 파트너임을 인정하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 이들의 업적을 우대하는 문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환경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올바른 제도가 정립될 수 있다. 우리 생태계는 이번 사태들을 생태계 내부의 윤리와 공익을 저해하는 처사로 받아들이고 있다.새해 초 이재명 정부는 ‘국가창업시대’를 선언하고, 대국민 창업 오디션인 ‘모두의 창업’ 프로젝트 등 구체적인 계획을 발표했다. 정부의 강력한 의지에 생태계도 활기를 되찾는 모양새다.국가 주도의 행사는 환영할 만한 일이다. 다만 정부는 건강한 창업 문화를 정착시키는 데 더욱 세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어반베이스나 루센트블록의 사례처럼 혁신가들의 노력이 제도라는 이름 아래 부정당하는 일이 반복된다면, 진정한 국가창업시대는 오지 않을 것이다. ‘모두의 창업’ 프로젝트가 단순한 행사를 넘어, 더 나은 창업 문화를 만드는 마중물이 되기를 진정으로 희망한다. 필자는 전남대 경영대학 교수로 창업생태계와 창업실패를 연구하고 있다. 다국적 기업과 창업생태계 현장을 모두 경험하고 연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창업생태계를 가까이 하면서 창업자들과 유연하고 창의적인 시각을 공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26.03.21 10:00

3분 소요
AI 변호사는 인간 변호사를 대체할 수 있을까 [김기동의 이슈&로(L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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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AI)의 발전 속도가 너무 빠르다. 지난 2022년 11월 생성형 AI 챗GPT가 등장할 때만 해도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AI’라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었다.그러나 이제 AI 에이전트의 시대가 찾아왔다. 오픈클로(OpenClaw), 클로드 코워크(Claude Cowork) 같은 도구들은 AI가 스스로 작업을 계획하고 실행한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올해 CES 기조연설에서 ‘피지컬 AI 시대’의 개막을 선언했다. AI가 디지털 공간을 넘어 물리적 세계의 행위 주체로 확장된다는 의미다.이 변화가 산업과 일자리에 미치는 충격은 전방위적이다. ‘SaaS(서비스형 소프트웨어) 종말론’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직원 수 기준으로 요금을 산정하는 기존 소프트웨어 사업 모델이 유지될 수 없다는 뜻이다. 앤트로픽이 클로드 코워크 기업용 플러그인을 발표한 직후 불과 일주일 만에 글로벌 소프트웨어 주가에서 약 1조 달러가 증발했다. 시장은 이미 답을 내리고 있다.어떤 직업이 위협받는가는 항상 대중의 관심사다. 다리오 아모데이 앤트로픽 CEO는 AI가 2030년까지 초급 화이트칼라 업무의 절반을 자동화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OpenAI·펜실베이니아대 연구진은 언어·문서 작성 역량에 의존하는 업무일수록 AI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고 분석했다. 변호사가 AI 대체 가능 직업 상위권에 빠지지 않고 이름을 올리는 이유다.필자 역시 실무에서 AI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법무법인 차원에서도 여러 영역에 AI를 도입해 업무 효율을 높이고 있다. 과거라면 몇 시간이 걸리던 정리 작업이 훨씬 짧은 시간 안에 가능해졌고, 자료 탐색의 폭도 넓어졌다. 정형화된 서식 작성, 대량의 자료 검토, 유사 판례 검색 같은 반복 업무에서 AI는 이미 사람의 속도를 아득히 넘어섰다. AI를 능숙하게 다루는 변호사와 그렇지 않은 변호사 사이에는 생산성 격차가 뚜렷하게 벌어지고 있다. 이 흐름은 되돌릴 수 없다.그러나 역설적이게도 AI의 눈부신 발전은 오히려 인간 변호사를 대체할 수 없는 구조적 한계를 더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AI가 넘지 못하는 세 가지 한계첫째, ‘데이터의 고갈’이다. 대규모 언어모델은 방대한 텍스트와 이미지를 학습해 성능을 높여 왔다. 그러나 고품질 학습 데이터는 무한하지 않다. 비영리 연구단체 에포크 AI(Epoch AI)는 2024년 논문에서 AI가 공개적으로 학습할 수 있는 고품질 텍스트 데이터가 2026년에서 2032년 사이에 바닥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연료가 떨어지면 엔진도 멈춘다.둘째, ‘모델 붕괴’의 문제다. AI가 생성한 콘텐츠를 다시 AI가 학습하는 순환이 반복되면 모델의 품질이 급격히 저하된다. 복사본의 복사본을 계속 만들면 원본의 선명함이 사라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온라인 공간에 AI 생성 콘텐츠가 넘쳐날수록 이 문제는 더욱 현실적인 위험이 된다.셋째, ‘환각’(Hallucination)이다. 법률 분야에서 이 문제는 특히 치명적이다. AI는 존재하지 않는 판례를 실제처럼 제시하거나, 없는 법조문을 그럴듯한 문체로 만들어낸다. 더 큰 문제는 전문가조차 한눈에 이상을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법률 문서에서 이러한 오류는 단순한 실수로 끝나지 않는다. 당사자의 권리와 의무, 소송의 방향, 때로는 형사 책임 여부에까지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AI가 틀려도 그럴듯하게 틀리는 세계에서 검증 능력은 곧 전문성이다.이러한 구조적 한계는 AI가 아무리 정교해져도 그 결과물에 대한 전문가의 검증이 불가결함을 보여준다. 나아가 AI가 변호사를 대체할 수 없는 본질적 이유가 있다. 어떤 사건도 똑같지 않으며 많은 사건은 생물처럼 변화한다. 사실관계의 이면을 읽어 쟁점을 구성하고, 상황 변화에 맞춰 전략을 조정하며, 선례가 없는 영역에서 새로운 논리를 설계하는 일은 인간 변호사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다.실무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는 의뢰인의 막연한 호소 속에서 법적으로 의미 있는 쟁점을 포착해 내는 것이다. 의뢰인의 진술에는 중요한 사실과 그렇지 않은 사실이 뒤섞여 있다. 불리한 내용은 누락되거나 본인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변호사는 그 속에서 핵심을 가려내고 필요한 사실을 끌어내며 전체 구조를 다시 세운다. 이는 단순히 자료를 정리하거나 유사 사례를 찾는 차원이 아니다. 드러난 사실과 드러나지 않은 사실을 함께 읽어 법적 의미를 부여하는 판단의 영역이다. 데이터는 과거를 학습하지만 변호사는 지금 이 사건을 읽는다.협상과 변론에서는 이 차이가 더욱 뚜렷해진다. 상대방의 미묘한 태도 변화를 읽고 전략을 조정하는 일, 법정에서 판사의 질문 취지에 따라 변론 방향을 즉각 수정하는 일, 의뢰인에게 불리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최선의 선택을 함께 설계하는 일은 텍스트 생성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법정은 살아있는 공간이다. AI는 그 공간에 없다.법은 고정된 정답의 목록이 아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규범 체계이며 사회 변화에 따라 해석과 적용이 끊임없이 수정된다. 기존 법리가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현실의 분쟁으로 나타나는 것이 법의 숙명이다. AI 창작물의 저작권, AI의 데이터 사용과 개인정보보호 문제처럼 판례가 충분히 축적되지 않고 사회적 합의가 형성 중인 영역에서는 기존 데이터를 학습한 AI만으로 답을 찾기 어렵다. 어제의 데이터로 오늘의 분쟁을 해결할 수는 없다.결국 AI는 변호사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변호사의 업무 방식을 바꾸고 있다. AI가 초안을 만드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그 초안에 대한 법률적 판단과 책임의 가치는 오히려 커진다. 의뢰인이 궁극적으로 믿고 의지할 대상은 기술 자체가 아니다. 그 기술을 적절히 활용하면서도 최종 결과에 책임지는 변호사다.AI의 한계를 정확히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는 역량, 그것이 AI 시대에 변호사의 가치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 이제 변호사도 프롬프트 엔지니어링(prompt engineering) 능력까지 갖춰야 한다. 도구가 강력해질수록 도구를 다루는 사람의 판단이 더 중요해진다. 변호사의 일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더 늘어만 간다.김기동 법무법인 로백스 대표변호사

2026.03.2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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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값이 곧 민심’…2026 지방선거, 부동산 투표가 판을 흔든다[김현아의 시티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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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6월 지방선거가 다가올수록 한국 정치의 오래된 진실 하나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후보의 정치 철학도, 공약의 정교함도 아닌 ‘집값’이 유권자의 선택을 결정짓는 가장 강력한 기제로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정치학자들은 이 현상에 ‘부동산 투표’(Real Estate Voting)라 이름을 붙였고, 이제 그것은 단순한 학술 가설을 넘어 데이터로 입증된 한국 선거의 확고한 구조적 문법이 됐다. 물론 이번 2026년 지방선거에서 부동산 민심이 전체 선거판을 온전히 압도할지는 미지수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탄핵과 비상계엄이라는 전대미문의 정치적 격랑이 남긴 여진이 여전히 유효하며 최근 이란의 전쟁상황이 대외적 안보이슈와 물가비상이라는 민생이슈로 국가적 위기감을 고조시키고 있기 때문에 집권 여당에 힘을 실어주는 ‘결집의 민심’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대외적 변수가 단기적 충격에 그친다면 6월의 선거판, 특히 서울시장 선거를 뒤흔들 핵심 뇌관은 결국 부동산이 될 가능성이 높다.학계가 입증한 부동산 투표의 원리유권자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투표에 영향을 미친다는 ‘경제 투표’ 이론을 부동산과 연관지을때 학계는 크게 두 가지 경로로 설명한다. 첫째는 회고적 투표(Retrospective Voting)다. 집권 세력의 부동산 정책이 피해를 줬다면 가차 없이 처벌을 내리는 방식이다. 숭실대 신정섭 교수의 논문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 나타난 주택소유와 투표선택: 회고투표 vs. 자산투표’(2022)는 부동산 정책 실패가 어떻게 정권 교체로 이어졌는지를 실증적으로 분석했다. 둘째는 자산 투표(Patrimonial Voting)다. 주택 보유자가 집값이 오를수록 자산 가치를 지켜줄 정치 세력을 지지하는 경향이다. 동아시아연구원(EAI)의 보고서 ‘2024년 총선에서의 자산 투표: 수도권 유권자를 중심으로’(2024)에 따르면, 자산 상위 집단이 보수 정당에 투표할 확률은 다른 집단에 비해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높았다. 이미 부동산은 단순한 주거 공간을 넘어 유권자의 정치적 지향점을 결정하는 자산 가치의 척도로 작동한다.과거 선거 사례들은 부동산 투표의 실체를 선명하게 증명한다. 그 최초의 전국적 폭발은 2006년 5·31 지방선거였다. 참여정부는 임기 내내 집값 급등과 씨름했고 “집값 반드시 잡겠다”는 대통령의 잇단 공언이 빈말로 판명되면서 부동산 정책에 대한 신뢰는 완전히 무너졌다. 그 결과 집권당인 열린우리당은 선거사상 유례없는 참패를 당했다. 이 선거는 부동산 민심이 지방선거를 통해 집권 여당을 심판한 최초의 원형으로 기록된다. 그 여진은 1년 후 대선으로도 그대로 이어졌다. 2007년 제17대 대선에서 유권자들은 참여정부의 규제 일변도 부동산 정책에 등을 돌리고 ‘규제 완화’와 ‘공급 확대’를 내세운 이명박 후보를 역대 최대 득표 차이로 선택했다. 연이어 2008년 제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의 서울 압승을 이끈 핵심은 ‘뉴타운·재개발’ 공약이었다. 이는 한국 선거사에서 ‘부동산 보상투표’의 전형적인 원형이 됐다. 2006년부터 2008년까지 이어진 연속적 선거 결과는 부동산 심판이 지방-대선-총선을 가리지 않고 작동하는 전국적 투표 메커니즘임을 확인시켜 줬다.반면 2021년 4·7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처벌의 정치’가 다시 서울을 기점으로 폭발한 해였다. 문재인 정부하에서 누적된 집값 폭등과 규제 일변도의 정책, LH 사태가 유권자들의 불만에 기름을 부었고, 오세훈 후보의 압승은 그에 대한 준엄한 회고적 심판이었다. 이 서울의 민심 이반은 이듬해 전국 대선으로도 곧장 파급됐다. 2022년 제20대 대선에서 유주택자들은 징벌적 과세와 규제에 분노해 자산 방어를 위해 결집했고 무주택 서민들은 ‘벼락거지’로 전락했다는 상대적 박탈감에 처벌 투표에 합류했다. 전혀 다른 지위의 두 집단이 ‘부동산 실패’라는 공통의 이유로 정권 심판에 가담했던 역설적 순간이었다. 2025년 5월 조기 대선에서는 탄핵이라는 거대 서사가 선거를 주도했지만, 서울의 득표율은 여전히 아파트 가격과 강한 상관관계를 보이며 ‘부동산 계급투표’의 흔적을 뚜렷이 남겼다. 서울에서 시작돼 전국을 바꾼 ‘보상’과 ‘처벌’의 반복한편, 비수도권의 투표 방정식은 정반대다. 미분양 물량의 적체와 인구 감소로 인한 하방 압력 속에서 지킬 자산 가치가 사라진 곳에서 자산 투표는 무력하다. 비수도권 유권자들을 자극하는 것은 ‘소외감’이다. 이재명 정부의 부동산 대책이 수도권 집값 관리에 집중돼 있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중앙정부가 지방의 생존권을 방치하고 있다’는 분노가 표심의 밑바닥에 깔려 있다. 이재명 정부가 ‘5극 3특’ 지방시대 정책에 공을 들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지금 서울의 유권자들은 이재명 정부 부동산 정책의 기묘한 양면성 앞에 서 있다. 알맹이 없는 공급 대책은 실망을 안겼고 토지거래허가구역 확대는 중산층 서민들의 재산권을 옥죄었다. 과도한 금융 규제가 더해지며 서민들은 시장에서 퇴출되고 현금 부자들만 유리한 불공정한 환경이 고착화됐다. 그러나 이 정책적 참사를 덮는 것은 이재명 대통령 특유의 강렬한 상징 정치다. 공격적인 SNS 메시지와 다주택자 압박, 분당 자택 처분이라는 상징적 행위는 시장에 즉각적인 냉각 효과를 불러왔다. 서울 일부 지역에서 급매물이 등장하고 가격이 하락하면서 단기적으로는 부동산 민심이 대통령의 서사에 동조하는 기현상도 감지되고 있다. 하지만 매매 가격의 일시적 하락 이면에는 전세 물량 실종과 전세의 월세 전환 가속화라는 임대차 시장의 붕괴가 진행 중이다. 결국 2026년 6월의 선택은 열려 있다. 유권자들이 대통령의 정치적 퍼포먼스가 주는 단기적 효과에 힘을 실어줄지, 아니면 누적된 정책 실패와 재산권 침해의 고통을 심판할지는 누구도 예단할 수 없다. 서울의 부동산 민심은 지금, 6월의 심판대를 향해 소리 없는 카운트다운을 시작했을 뿐이다.

2026.03.1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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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 기업이 만든 AI가 전쟁 핵심 전력 되는 시대[한세희 테크&라이프]

전문가 칼럼

이란에 대한 미국과 이스라엘의 최근 전면 공습은 50년 가까운 시간의 흐름이 누적된 결과다. 하지만 가까운 원인을 따지자면 2023년 10월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침공하고 민간인까지 납치 살해하며 시작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 뻗어 나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하마스와 싸우는 한편, 레바논 헤즈볼라와 예멘 후티 번군도 공격했다. 하마스와 헤즈볼라, 후티는 중동에서 이스라엘과 미국을 약화시키기 위해 이란이 지원하는 이란 대리 세력들이다. 이어 이스라엘은 2025년 6월 이란을 기습해 주요 군사 및 핵 시설을 파괴했고 핵 과학자와 정치인 등을 암살했다. 미국도 이스라엘에 가세해 이란 핵 시설을 폭격했다. 이른바 ‘12일 전쟁’이다. 이후 이란과 미국, 이스라엘이 이란 핵무장 포기 등을 놓고 벌인 지루한 협상은 결국 2월 말 미국과 이스라엘의 또 한 번의 대규모 공격으로 귀결됐다. 이란 둘러싼 갈등에서 ‘전쟁 AI’ 등장 현재 이란을 둘러싼 급박한 정세가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전쟁에서 비롯된 것처럼 지금 이란 공습에서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새로운 기술 하나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 처음 논란이 된 바 있다. 바로 전쟁을 위한 인공지능(AI) 기술이다. 2024년 이스라엘 군이 민간인 사이에 섞인 하마스 병력을 식별하기 위해 AI를 쓰고 있다는 폭로가 나왔다. 이스라엘은 ‘라벤더’라는 AI 시스템을 개발, 무리 중 누가 하마스 무장 세력에 참여하는 사람인지 식별했다. 여러 데이터를 수집하고 연결 관계를 분석, 하마스 무장 조직원인 것으로 판단되면 폭격을 가했다. 보도에 따르면 최대 3만7000명이 라벤더 AI에 의해 병력으로 판단되기도 했다고 한다.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결정에 AI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당시로선 AI가 실제 전장에서 활용된 최대 규모 사례로 꼽힌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 가능성을 보인 군사 AI 활용은 이번 공습에서 제대로 위력을 발휘했다. 미군이 이란 최고지도자와 정부 고위 인사들, 주요 핵 시설과 군사 기지를 타격할 작전을 짜고 우선순위를 정할 때 AI 스타트업 앤트로픽의 ‘클로드’ 모델과 팔란티어의 ‘메이븐 스마트 시스템’ 등을 적극 활용했다. 179개 출처에서 데이터를 수집하는 메이븐에 클로드를 결합해 정보 수집과 표적 식별, 작전 계획 및 전투 결과 평가 등을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정확하게 수행할 수 있었다.이스라엘의 라벤더 AI가 하던 일을 훨씬 큰 규모로, 더 빠르고 정확하게 하게 된 것이다. 데이터를 분석해 공격 표적을 빠르고 효과적으로 찾아낸다는 점에서 둘은 같다. 1등 공신 앤트로픽, 도리어 퇴출 위협?하지만 세상에 주는 충격은 같지 않다. 팔레스타인 일대에서 무장 세력 참여자를 찾아내 제거하는 것과 한 나라 최고지도자와 고위 인사 수십 명을 추적해 은신처에 미사일을 보내는 일은 다르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앤트로픽 클로드는 올해 초 미군이 베네수엘라를 습격해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 부부를 붙잡아 올 때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다른 나라의 방공망을 사이버 공격으로 마비시키고 최고 지도자와 고위 인사들의 동선을 낱낱이 파악해 미사일을 날리거나 특공대를 보내 체포하는 장면은 새로운 종류의 ‘초강대국’의 등장을 예감하게 한다. 팔레스타인의 라벤더에서 테헤란의 클로드까지 2년 남짓한 시간 동안 AI는 놀랄 정도로 발전했고, 생소하고 강력한 힘이 처음 등장할 때 늘 그랬듯 우리는 본능적 두려움과 당혹감을 느낀다. 이런 당혹 속에서 우리는 이 새로운 힘을 어떻게 써야 할지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다. 미국 정부와 앤트로픽의 최근 대립은 이 논의가 혼란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란 점을 보여주는 듯하다. 앤트로픽 클로드는 마두로 체포 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정작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란 공습 직전인 2월 말 모든 연방 기관에 앤트로픽 기술 사용을 중단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앤트로픽이 클로드를 국방부에 공급하는 조건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AI를 인명 살상 여부의 자율적 판단이나 내국인 대규모 감시엔 사용하지 말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AI의 윤리적 활용을 강조하는 앤트로픽의 평소 기조와 부합하는 요구이나, 합법 범위 내에서 AI 사용 범위를 제약 없이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미국 전쟁부와 입장이 갈렸다. 이로 인해 트럼프 대통령은 앤트로픽을 ‘공급망 위험 기업’으로 지정하고 국가안보 관련 시스템에서 앤트로픽 제품 사용을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직후 시작된 이란 공습에서 앤트로픽의 AI는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정부는 AI의 강한 능력을 활용하고자 하지만 민간 기업에 예속될 가능성을 우려하고, 기업은 강한 국가의 영향력 아래 스스로의 원칙을 포기하도록 강요받는 상황을 우려한다. AI는 제2의 핵무기아마도 제2의 핵무기와 같은 의미를 갖게 될 가능성이 큰 AI 기술을 놓고, 정부가 기술을 가진 민간 기업의 결정에 예속되는 상황을 받아들이리라 기대한다면 순진한 것일 터다. 경쟁 AI 기업들이 정부와 거래를 트고 싶어하는 상황에서 앤트로픽의 윤리적 원칙은 의미를 잃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미국 정부는 오픈AI와 국방 관련 AI 활용에 대한 계약을 맺었고, 앤트로픽은 “경쟁사가 하는 만큼은 우리도 하겠다”며 원칙에서 물러나는 입장을 밝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픈AI의 로봇 부문 책임자가 국방 계약 체결에 반발하며 퇴사하는 등 조직 내부는 뒤숭숭하다. 안보를 위해 최첨단 AI를 국가가 활용할 수 있게 해야겠지만, AI가 시민의 자유와 프라이버시를 겨누지 않게끔 통제하는 방법 논의가 필요하다. AI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지뢰나 화학무기, 집속탄 같은 위험한 무기의 사용을 국제 조약으로 규제하듯 AI 규제를 위한 국제적 약속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강대국이나 불량 국가는 이런 조약에 가입하지 않거나, 가입하더라도 규제를 우회하는 방법을 찾아내기는 하지만 말이다.

2026.03.1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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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봉투법과 AI발 노동 대전환의 시대 [EDITOR’S LETTER]

전문가 칼럼

두 번의 대통령(전 정부) 거부권, 경영계와 야당의 거센 반대를 뚫고 작년 입법화된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 개정 법률)이 6개월의 준비기간을 마치고 3월 10일 정식 시행에 들어갔습니다. 노란봉투법은 하청 노동자에 대한 원청 책임을 강화하고 노동쟁의 범위를 넓히는 동시에 파업 노동자에 대한 기업의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하도록 한 것이 주요 골자입니다. 이에 하청업체 등 간접고용 근로자도 원청 사용자와 단체교섭 등을 할 수 있게 되면서 자동차·조선·석유화학업계 등 곳곳에서 하청 노조들의 원청 교섭 요구가 봇물 터지듯 분출되고 있습니다. 대형 노동자단체인 민주노총은 하청 노조의 교섭 요구를 회피하는 사업장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고 오는 7월에는 총파업까지 전개한다는 계획입니다. 그동안 기업 경영진이 좀 더 유리했던 노사 환경에서 노란봉투법이라는 친노동법이 도입되면서 노동자들, 특히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던 비정규직·특수 노동자 등이 자신들의 권리를 찾아 나선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입니다. 하지만 기업들은 울고 싶은 심정입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고 일부 개선 움직임도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전쟁’이라는 돌발 악재로 유가 및 환율이 요동쳐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이런 위기에서는 노사가 하나로 똘똘 뭉쳐도 모자랄 판에 내부에서 노사가 갈라져 대립하게 돼 대응 역량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노사 관계는 늘 좋을 수가 없습니다. 또 어느 한쪽에 일방적으로 양보를 요구할 수도 없습니다. 대화와 타협을 통해 어느 선에서는 서로 악수를 해야 합니다. 지금처럼 기업들이 국내외적인 다양한 도전에 직면해 있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최근 기업들은 로봇 도입과 AI(인공지능) 전환의 시대를 맞아 일하는 방식을 바꿔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대전환의 흐름을 외면해서는 생존할 수 없다는 게 자명한 만큼 다들 AI·로봇으로의 대전환에 적극 나서고 있습니다. 문제는 노동자의 일자리가 줄어들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노조의 반발이 크다는 겁니다. 현대자동차그룹이 자회사 보스턴다이내믹스를 통해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를 개발하고 있는데, 노조측은 “노사 합의 없이는 단 한 대도 들여올 수 없다”며 반대하고 있습니다. 사람처럼 걸어 다니며 관절을 이용해 생산 작업을 할 수 있는 아틀라스가 생산 현장에 투입되면 고용 충격이 예상된다는 이유에서입니다. 도입이 된 것도 아닌데 반대부터 한 셈이어서 비판 여론이 컸는데요, 노조측은 “기술 발달을 저해할 생각이 아니라 충분한 숙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라며 한발 물러났습니다. AI·로봇이 일상 속으로 빠르게 파고들면서 노동 생태계도 큰 변화가 불가피한데요, 그렇다고 ‘일자리 축소’라는 결론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아직은 미지의 세계인 만큼 노사가 대화와 타협을 통해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어가야 할 때입니다. 그 길에서 노란봉투법이 갈등의 증폭제가 아니라 상생을 위한 숙의의 장을 여는 시발점이 되어야 할 텐데요, 이는 노사 모두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2026.03.1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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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비통 vs 강남 수선집의 '리폼 전쟁'...대법원 판단 살펴보니 [백세희의 컬처&로(LAW)]

전문가 칼럼

지난달 말 대법원은 명품 브랜드 루이비통과 국내 수선업체 강남사 간 소송에서 주목할 만한 판결을 내놓았다. 루이비통이 이른바 ‘리폼’ 업체를 상대로 제기한 상표권 침해 금지 및 손해배상 청구 사건이었다. 대법원은 수선업자가 루이비통 상표권을 침해했다는 1·2심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특허법원으로 돌려보냈다(대법원 2026. 2. 26. 선고 2024다311181 판결).원고 루이비통은 잘 알려진 글로벌 명품 브랜드다. 특유의 로고는 1896년 창안된 이후 전 세계적으로 널리 사용돼 왔다. 루이비통의 2020년 매출은 약 1조467억원에 이른다. 피고 강남사는 국내에서 가방과 지갑 등의 수선·제작업을 하는 사업자다. 2017년부터 2021년까지 명품 가방 소유자들의 요청에 따라 대가를 받고, 명품 로고가 표시된 가방의 원단이나 금속 부품 등을 활용해 전혀 다른 형태의 가방과 지갑을 만들어 왔다. 이런 가공 행위를 흔히 ‘리폼’이라 부른다.리폼은 약 8~9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한동안은 누구도 크게 문제 삼지 않는 새로운 시장이었다. 유행이 지난 명품 가방을 다른 제품으로 바꿔 사용하려는 소비자와, 이를 수선해 용역비를 받는 수선업자가 주요 참여자였다. 그러나 이 흐름에 편승해 출처가 불분명한 명품 부자재를 대량으로 확보해 리폼 제품을 만든 뒤 온라인 쇼핑몰에서 판매하는 사례도 등장했다. 예컨대 샤넬 로고가 새겨진 단추에 침을 달아 귀걸이로 만든 뒤 ‘업사이클링 제품’이라며 판매하는 식이다.명품 브랜드들은 이러한 움직임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수선업자와 업사이클링 판매자를 가리지 않고 상표권 침해를 주장했다. 실제로 “내용증명을 받았다”는 상담도 잇따랐다. 법적으로 다툴 여지가 있어 보이면서도, 글로벌 브랜드와 소송을 벌이는 부담 때문에 쉽게 맞서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결국 루이비통은 타협하지 않은 강남사를 상대로 2022년 2월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이 시작됐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다른 리폼 업체들은 온라인 광고를 내리거나 사업을 중단했고, 일부는 조용히 영업을 이어갔다.전혀 다른 제품이 되는 리폼…1·2심의 판단“내 돈 주고 산 가방인데 마음대로 고쳐 쓰지도 못하나.” 루이비통의 소송 소식을 접한 많은 이들의 반응이었다. 실제로 인터뷰와 칼럼을 통해 의견을 들어보면 상당수는 루이비통의 소 제기를 과도하다고 봤다.그러나 다른 시각도 있었다. 법원에 제출된 리폼 제품 사진을 보고 나면 생각이 달라진다는 의견이었다. 일부 리폼 제품은 단순한 수선을 넘어 새로운 제품을 창조한 수준에 가까웠다. 현재 판매 중인 신제품과 거의 동일한 디자인의 제품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런 제품이 중고 시장에 유통될 경우 소비자가 정품으로 오인할 가능성도 충분해 보였다.1·2심 법원의 판단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리폼 제품이 독립된 교환가치를 지닌 채 중고 시장에서 거래된다면 이는 상표법상 ‘상품’에 해당하며, 소비자가 루이비통 정품으로 오인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상표의 사용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법원은 리폼 제품을 판매하는 행위뿐 아니라 리폼 행위 자체와 완성 제품을 의뢰인에게 전달한 행위까지도 상표권 침해로 판단했다.그러나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핵심은 ‘개인적 용도의 사용’이었다. 명품 가방의 원단과 부자재를 이용해 새로운 제품을 만든 뒤 이를 개인이 직접 사용하는 경우라면 상표법 위반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제 조건은 분명하다. 리폼 제품이 상거래에 제공되거나 시장에 유통되지 않고 오직 개인적 용도로 사용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리폼 과정에서 이루어진 상표 표시 행위가 상표법상 ‘상표의 사용’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대법원은 또 중요한 현실적 문제를 짚었다. 리폼 작업에는 상당한 시간과 노동,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에 소비자가 직접 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만약 소유자가 직접 하는 리폼만 허용하고 수선업자를 통한 리폼을 금지한다면, 소유자의 자유는 사실상 형식적인 권리에 그칠 수 있다는 것이다.따라서 수선업자의 리폼 행위라도 소유자의 의뢰에 따라 이루어지고 결과물이 개인적 사용에 머문다면 위법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결국 이 사건에서 피고 수선업자는 루이비통의 상표권을 침해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됐다.대기업 명품 브랜드와 국내 수선업체의 법정 공방이라는 점에서 이 판결은 큰 화제를 모았다. 국내 최대 로펌을 선임한 루이비통을 상대로 작은 수선업체가 승소했다는 점에서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다”는 평가도 나왔다. 또 “국내 최대의 로펌인 김앤장을 선임한 루이비통을 이긴 수선집!”이라는 이 서사를 주제로 벌써 ‘소송의 뒷이야기’ 같은 후속 기사들도 나오기 시작한 것 같다.‘위법한 리폼’은 무엇일까다만 이번 판결이 모든 리폼을 허용한 것은 아니다. 대법원은 상표권 침해가 될 수 있는 리폼의 기준도 함께 제시했다.형식적으로는 소비자의 의뢰가 있었더라도, 실제로는 리폼업자가 주도적으로 제품을 생산해 판매하고 시장에 유통시키는 경우라면 상표법상 ‘상표의 사용’에 해당해 침해가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예를 들어 리폼 제품의 디자인이나 형태, 생산 개수 등에 대한 최종 결정권을 수선업자가 가지고 있는 경우, 소비자가 가져온 명품 제품은 일부만 사용하고 수선업자가 보유한 부자재를 대부분 활용해 제품을 만드는 경우, 혹은 리폼 전 제품의 소유권을 수선업자에게 넘겨 판매 목적의 제품을 만드는 경우 등이 이에 해당할 수 있다. 또 리폼이 개인 사용이 아니라 제3자 판매를 위한 것임을 수선업자가 알거나 알 수 있었던 경우에도 상표권 침해가 성립할 수 있다.다만 이러한 사정을 입증할 책임은 상표권자인 명품 브랜드에 있다. 브랜드 측이 리폼업체를 상대로 상표권 침해 소송을 제기하려면 이러한 구체적 사실들을 모두 증명해야 한다.대법원의 이번 판결로 한동안 주춤했던 명품 리폼 시장이 다시 살아날 것 같다. 하지만 이에 편승해 명백히 위법인 유사 행위도 다시 활개를 칠까 걱정이다. 소유자가 오래된 자기 물건을 가지고 와 고쳐달라는 게 아니라, 업자가 출처 불명의 부자재를 가공해 이른바 명품 ‘업사이클링’이라 주장하는 방식이 그렇다. 폐기 대신 재활용(recycling) 또는 새활용(upcycling)을 통해 제품 수명을 연장하려는 소비자들의 선한 뜻을 이용해 명품 브랜드들의 명성에 무임승차하는 이들이다. 예컨대 단추에 침을 달아 귀걸이를 만들거나, 가방 로고를 목걸이 펜던트로 가공해 판매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는 리폼업자가 제품 생산과 판매를 주도하며 시장에 유통시키는 행위로, 대법원이 제시한 상표권 침해 사례에 정확히 해당할 가능성이 높다. 더 큰 문제는 그 부자재가 실제 명품에서 나온 것인지조차 확인하기 어렵다는 점이다.이번 판결은 미국, 유럽, 일본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그 결과를 지켜보고 있던 중요한 사건이다. 사회적 파급 효과도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 이런 판결을 접하면 짜릿하다. 생활 속 분쟁이 명료하게 정리되는 것을 볼 때마다 우리 사회가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이다. 독자들도 함께 이 기분을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백세희 법률사무소 아트앤 대표변호사

2026.03.14 10:00

5분 소요
‘같은 1등급’의 함정…내신 9→5등급제, 2028 대입 변수로 [임성호의 입시지계]

전문가 칼럼

2027학년도 대학입시를 끝으로 내신 9등급제는 사실상 막을 내린다. 2028학년도 대학입시부터는 내신 등급 체계가 5등급제로 개편된다. 현행 9등급제에서는 학교 내신 상위 4%까지 1등급, 11%까지 2등급, 23%까지 3등급, 40%까지 4등급, 60%까지 5등급, 77%까지 6등급, 89%까지 7등급, 96%까지 8등급이 부여된다. 상위 96% 미만에 해당하는 학생은 9등급으로 처리된다. 반면 5등급제에서는 상위 10%까지 1등급, 34%까지 2등급, 66%까지 3등급, 90%까지 4등급을 부여하고, 상위 90% 미만은 5등급으로 분류된다. 등급 체계 변화가 불러올 가장 큰 변수는 2028학년도 대입부터 나타난다.같은 1등급, 다른 기준2028학년도 대학입시에서는 고3 수험생이 5등급제 내신 성적표를 제출하는 반면, N수생은 9등급제 내신 성적표를 제출하게 된다. 이때 대학으로서는 ‘같은 1등급’이라도 서로 다른 기준에서 산출된 성적표를 동시에 받아보게 되는 셈이다. 특히 대학이 9등급제에서 상위 4%에 들어 획득한 1등급 수험생과, 5등급제에서 상위 10% 이내에 들어 1등급을 받은 수험생 중 어떤 학생을 최종적으로 더 높게 평가할지가 입시 현장에서 중요한 관전 요소로 떠오를 가능성이 있다. 통계적으로만 놓고 보면 9등급제 1등급이 상위 4%로 더 촘촘하게 압축돼 있어 ‘희소가치가 높다’고 객관적으로 평가할 여지가 있다는 점도 함께 제기된다. 결국 대학들이 어떤 방식으로 두 성적표를 해석하고 반영하느냐에 따라 입시 지형에 큰 변화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더 나아가 2029학년도 입시에서는 ‘등급 체계 혼재’가 한 단계 더 복잡해질 수 있다. 만약 대학이 내신 9등급제 1등급을 더 선호하는 방향의 평가 경향을 보인다면, 2029학년도에는 고3과 재수생이 5등급제 성적표를 제출하고, 삼수생 이상부터는 9등급제 성적표를 제출하게 된다. 이 경우 삼수생 이상이 상대적으로 유리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될 수 있다. 물론 내신 5등급제에서는 고교학점제가 전면 적용되는 만큼, 학생부의 다양한 활동 기록이 어떤 방식으로 평가받느냐가 또 다른 관건이 될 수 있다.이런 변화는 ‘마지막 9등급제 입시’인 2027학년도에도 파급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2027학년도는 현행 내신 9등급제가 적용되는 마지막 대입이다. 이 과정에서 내신 상위권 학생들의 대학 진학 이후 움직임에 변화가 생길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예컨대 현행 9등급제에서 내신 1등급을 확보했더라도, 상위권 학생들이 특히 선호하는 의약학 계열에 진학하지 못하고 일반 학과에 합격해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이 있을 수 있다. 이들 중 일부는 9등급제 마지막 대학입시 상황에서 당초 목표했던 대학(또는 의약학계열)로 ‘재진입’을 노리는 움직임을 보일 수 있다는 분석이다. 9등급제 내신 희소가치 소멸그 배경에는 ‘내신 성적표의 희소가치’ 문제가 놓여 있다. 2027학년도에 이미 확보한 상위권 내신 성적표를 활용하지 못한 채 시간이 지나면, 2028학년도에는 5등급제 고3 학생들과 섞여 경쟁해야 한다. 이때 9등급제 내신이 갖고 있던 희소가치가 사실상 소멸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여기에 2027학년도 대학입시부터 지역의사제가 도입되는 점도 변수로 꼽힌다. 지역의사제는 상위권 학생들의 대입 문호를 더 크게 확장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또한 향후 5년간 지역의사제는 확대되는 상황이 계속 예정돼 있다는 점에서, 중장기적으로도 입시 수요의 이동을 촉발할 여지가 있다.이미 ‘대학 중도 탈락’ 증가 흐름은 수치로도 확인된다. 서연고(서울대·연세대·고려대)의 최근 5년간 재학생 중도 탈락 수는 공시 기준으로 꾸준히 늘고 있다. 2020년 1,416명에서 2021년 1624명, 2022년 1971명, 2023년 2131명, 2024년 2126명으로 증가했고, 2025년에는 2496명으로 더 늘었다. 이들 서연고 중도 탈락 학생의 상당수는 의약학 계열로 재입학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분석이 뒤따른다.범위를 주요 10개대로 넓혀도 흐름은 유사하다. 주요 10개대 중도 탈락 인원은 2020년 5827명, 2021년 6790명, 2022년 7265명, 2023년 7576명, 2024년 7781명, 2025년 8683명으로 가파른 증가세를 보인다. 주요 10개대에서 중도 탈락한 학생들 역시 의약학 계열 또는 상위권 대학으로의 재입학을 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된다.의대 재학생 상황도 예외로 보긴 어렵다는 평가가 나온다. 의대 재학생 가운데 중도 탈락자는 2020년 185명, 2021년 173명, 2022년 203명, 2023년 179명, 2024년 201명, 2025년 386명으로 집계됐다. 이를 의대·치대·한의대·약대 범위로 확대하면 수치는 더 크게 뛴다. 2020년 300명, 2021년 311명, 2022년 360명, 2023년 521명, 2024년 660명, 2025년 1004명으로 증가했다. 특히 의대 중도 탈락 학생의 72%가 지방권 소재 의대 재학생이라는 점도 언급된다. 의대 재학생의 중도 탈락은 대부분 수도권 또는 상위권 의대로의 재입학으로 볼 수 있으며, 치대·약대·한의대 역시 의대로의 재진입 또는 상위권 의약학 계열 대학으로 이동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2027학년도는 상징성도 크다. 2027학년도는 현행 내신 9등급제가 도입된 2008학년도 대학입시 이후 20년 만에 처음 맞는 ‘마지막 9등급제 입시’다. 따라서 내신 상위권 학생뿐 아니라 상황에 따라 중위권대 재학생까지도 5등급제로 바뀌기 이전, 마지막 입시에서 원하는 대학으로의 재진입을 노리는 사례가 상당수 발생할 수 있다는 예상이 제기될 수 있다.연도별로 등급 체계가 겹치는 구조도 복잡해진다. 2028학년도 입시에서는 고3이 5등급제 성적표를 제출하고, N수생은 9등급제 성적표를 제출한다. 2029학년도에는 고3과 재수생이 5등급제 성적표를 제출하며, 삼수생 이상부터는 9등급제 성적표를 제출하게 된다. 2030학년도에는 고3·재수·삼수생이 5등급제 성적표를 제출하고, 4수생 이상부터는 9등급제 성적표를 제출하는 형태로 겹침이 이어진다.결국 내신 정책 변화에 따른 불확실성은 커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더욱이 내신 제도 개편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또다시 진행되는 중이라는 점에서, 향후 입시 환경의 변동성은 더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2026.03.1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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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역사를 바꾼 10대 발명품 [와인인문학]

전문가 칼럼

와인은 ‘신의 물방울’이라 불리지만 그 물방울을 우리가 마시는 형태의 문화로 완성한 것은 인간의 끊임없는 탐구와 ‘발명’이었다. 인류가 포도를 발효시켜 알코올을 얻은 이래 와인의 품질과 유통 그리고 문화를 혁명적으로 진보시킨 10가지 결정적 발명품을 소개한다.로마의 실용성이 낳은 ‘맛의 연금술’첫 번째는 오크(참나무)통이다. 고대 와인 운송의 표준은 무겁고 깨지기 쉬운 점토 항아리인 ‘암포라’였다. 로마인들이 갈리아(현재의 프랑스)를 정복하며 발견한 나무통은 혁명이었다. 오크통은 굴려서 운반할 수 있어 물류의 혁신을 가져왔지만, 진정한 발명은 그 ‘화학적 작용’에 있다. 오크는 와인에 타닌과 바닐라, 토스트 향을 입히고 미세한 기공을 통해 와인을 숨 쉬게 해 맛을 부드럽게 해준 덕분에 복합미를 지닌 숙성주로 진화할 수 있었다.두 번째는 와인에 ‘시간’이라는 개념을 부여한 유리병이다. 17세기 이전까지 와인은 산화에 쉽게 노출돼 장기 보관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석탄을 연료로 하는 용광로의 발명으로 튼튼한 유리병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와인의 역사는 바뀌었다. 유리병은 와인을 외부 공기로부터 차단하여 산패를 막고 진정한 ‘숙성’을 가능하게 했다. 빈티지의 개념 그리고 수십 년을 견디는 위대한 와인의 탄생은 유리병 덕분이다. 세 번째는 유리병의 완벽한 단짝인 코르크 마개다. 유리병이 발명됐어도 그것을 막을 완벽한 마개가 없었다면 무용지물이었을 것이다. 나무 조각이나 기름 먹인 천을 쓰던 시절을 지나 17세기경 도입된 코르크는 와인 역사상 위대한 발견 중 하나다. 코르크의 유연성은 병목을 완벽하게 밀봉하면서도 아주 미세한 양의 산소만을 투과시키는 ‘미세 산화 작용’을 허락한다. 덕분에 와인은 병 속에서 질식하지 않고 천천히 숙성되며 제3의 아로마(부케)를 피워낼 수 있었다.네 번째는 와인을 지키는 보이지 않는 수호자라 불리는 이산화황(SO2)이다. 현대에는 첨가물로 오해받기도 하지만 이산화황의 사용은 와인을 상하지 않게 막아준 결정적인 발명이다. 고대부터 황을 태워 통을 소독하는 지혜는 있었으나, 이를 과학적으로 제어해 항산화제로 사용하게 된 것은 와인 품질 유지의 핵심이다. 이것 없이는 바다를 건너온 와인을 마실 수 없었을 것이며 곧바로 산화돼 갈색으로 변했을 것이다.다섯 번째는 멸종 위기에서 유럽 와인을 구한 접붙이기 기술이다. 19세기 후반 아메리카 대륙에서 건너온 진딧물 ‘필록세라’는 유럽의 포도밭을 초토화했다. 유럽종 포도나무가 멸종될 뻔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해낸 것은 바로 ‘접붙이기’ 기술이었다. 필록세라에 내성이 있는 미국 종 포도나무 뿌리에 유럽 종 가지를 접붙이는 이 발명은 오늘날 포도 재배의 표준이 됐다. 우리가 마시는 대부분의 프랑스, 이탈리아 와인은 사실 이런 접목 기술의 결과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부터 정교한 과학 기술까지여섯 번째는 불량품을 명품으로 바꾼 샴페인 제조 방식이다. 과거 와인에서 발생하는 기포는 ‘악마의 장난’이라 불리는 결함이었다. 그러나 돔 페리뇽과 동시대 수도사들 그리고 영국인들의 유리병 기술이 결합해 이 기포를 병 안에 가두는 기술을 완성했다. 병 속에서 2차 발효를 유도해, 높은 압력을 견디며 효모 찌꺼기를 제거하는 일련의 복잡한 공정의 발명은 와인을 단순한 술에서 축제의 상징이자 ‘럭셔리의 아이콘’으로 격상시켰다.일곱 번째는 대항해 시대를 견디게 한 보존 기술인 주정 강화다. 긴 항해 동안 와인이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 증류주를 첨가하는 아이디어는 포트·셰리·마데이라라는 위대한 와인 장르를 탄생시켰다. 이는 단순한 보존법을 넘어 발효를 중단시켜 천연 당분을 남기거나 산화적 숙성을 유도해 와인의 풍미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주정 강화 기술은 와인의 수명을 극도로 늘려준 획기적인 발명이다.여덟 번째는 와인 양조를 과학으로 진화시킨 파스퇴르의 미생물 연구다. 루이 파스퇴르 이전까지 와인 발효는 신비로운 자연 현상이었다. 파스퇴르는 효모가 당분을 알코올로 바꾼다는 원리를 규명하고 박테리아가 와인을 식초로 만든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의 연구 덕분에 인류는 비로소 ‘저온 살균법’을 비롯한 위생적인 양조 제어를 할 수 있게 됐다. 와인 양조학은 파스퇴르의 현미경 아래에서 비로소 과학으로 다시 태어났다.아홉 번째는 신선한 화이트 와인의 혁명이라고 불리는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와 온도 조절 시스템이다. 1960~70년대 도입된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와 냉각 기술은 현대 화이트 와인의 혁명을 가져왔다. 이전에는 통제가 어려웠던 발효 온도를 자유자재로 조절함으로써 포도 고유의 신선한 과일 향과 산도를 완벽하게 보존할 수 있게 됐다. 이 발명 덕분에 서늘하지 않은 지역에서도 훌륭한 화이트 와인을 생산할 수 있게 됐고, 전 세계 와인의 상향 평준화를 이끌었다.마지막은 ‘떼루아’(포도 재배 환경)를 지적재산권으로 만든 사회적 발명인 원산지 통제 명칭 제도다. 기술적 도구는 아니지만 1935년 프랑스에서 법제화된 원산지 통제 명칭(AOC) 시스템은 와인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제도적 발명’이다. 포도의 원산지가 와인의 품질과 가치를 결정한다는 떼루아의 개념을 법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 제도는 가짜 와인을 근절하고 지역별 와인의 개성을 보호하며 와인을 단순한 농산물이 아닌 ‘문화유산’이자 ‘브랜드’로 확립시켰다. 전 세계 모든 와인 법규의 모태가 된 위대한 발명이다.

2026.03.1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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