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형진 영풍그룹 고문이 사모펀드 MBK파트너스와 손잡고 고려아연 경영권 확보에 나선 지 2년이 지났지만 분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장 고문 측은 2024년 창업주 가문의 3세 공동경영이 한계가 봉착했다며 고려아연을 상대로 전문경영인 체제로의 전환과 지배구조 개선을 명분으로 경영권 확보에 나섰다. 당시 장 고문은 MBK를 모범적이고 진취적이고 믿음직한 회사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장 고문은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기업은 전문경영인이 맡아야 한다. 그게 주주에 대한 보답”이라며 “지분 15~20%만 가진 채 상장사를 개인 회사처럼 운영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했다. 특히 자녀에게 경영권을 물려주는 관행을 지적하며 “그렇게 물려받은 기업이 잘 되는 경우보다 잘 안되는 경우가 더 많다”고 강조했다.그러나 영풍 오너 일가가 보여준 모습은 이같은 발언과 거리가 멀다. 장 고문 자녀들이 지배하는 가족회사를 중심으로 지분 재편을 진행하는 한편 오너일가 3세 중 장남인 장세준 씨의 경영권을 강화하는 작업을 병행해 왔다. 영풍, 오너 3세 보유 테라닉스 지분 504억원에 인수 왜?2020년 영풍에서는 오너 일가와 관련된 지분거래가 줄이어 이뤄졌다. 영풍의 사업보고서 등에 따르면 영풍은 2020년 3월 27일 장형진 고문의 자녀 장혜선·장세준·장세환 씨가 보유한 비상장 계열사 테라닉스 지분 41.62%를 503억9011만7000원에 매입했다. 자녀별 매각대금은 장혜선 씨 약 328억원, 장세준 씨 약 121억원, 장세환 씨 약 54억원이다.테라닉스는 인쇄회로기판(PCB) 등을 생산하는 비상장사로, 당시 영풍 계열사 코리아써키트가 지분 50.1%를 보유한 최대주주였다. 영풍이 이미 계열사를 통해 지배하고 있던 회사의 오너 일가 보유 지분을 추가로 사들인 것이다. 테라닉스의 2019년 말 순자산은 약 1048억원이었다. 영풍이 매입한 지분 41.62%의 순자산가치는 약 436억원으로, 실제 매입대금보다 약 68억원 적었다. 거래가격을 기준으로 환산한 주가순자산비율(PBR)은 약 1.16배다. 자산가치보다 16% 높은 가격에 지분을 사들였다는 얘기다. 주목할 점은 지분 거래 직전 장세준 씨가 코리아써키트 대표이사에 선임됐다는 사실이다. 장형진 고문의 장남 장세준 씨는 2020년 3월 24일 코리아써키트 대표이사에 올랐다. 이후 불과 사흘 뒤 자신이 보유한 테라닉스 지분 10.03%를 영풍에 매각한 것이다.장세준 씨는 개인적으로 테라닉스 지분을 처분해 120억원이 넘는 현금을 손에 쥔 동시에, 테라닉스의 최대주주인 코리아써키트의 경영권까지 확보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오너 3세의 비상장 계열사 지분 현금화와 장남을 중심으로 한 핵심 전자계열사 경영체제 정비가 같은 시기에 이뤄진 것이다.이후 영풍의 전자계열사 사업구조도 장세준 대표가 이끄는 코리아써키트를 중심으로 재편됐다. 코리아써키트는 지난해 12월 테라닉스의 PCB 제조 부문을 인적분할해 흡수합병하기로 결정하고 올해 2월 합병을 완료했다. 테라닉스는 PCB 제조 부문을 넘긴 후 그룹 전자계열사의 부동산 관리와 공장 관련 사업 등을 담당하고 있다. 장형진 영풍 지분 776억원어치, 자녀들 가족회사로영풍이 테라닉스 지분한 인수한 이후 뒤이어 오너일가와 관련한 지분거래가 하나 더 이뤄진다. 장 고문이 보유한 영풍 주식중 일부가 자녀들이 지배하는 가족회사 '씨케이'로 넘어간 것이다. 씨케이는 2012년 장 고문과 배우자 김혜경 씨, 세 자녀가 각각 20%씩 출자해 설립한 유한회사다. 이후 장 고문이 지분을 정리하면서 2018년에는 자녀 3명의 합산 지분율은 88.5%로 늘어났다.씨케이는 2020년 6월 30일 장 고문으로부터 영풍 주식 11만7000주를 주당 45만8500원, 총 536억4450만원에 매입했다. 같은 해 9월 28일에는 장 고문이 보유한 5만2000주를 주당 46만원, 총 239억2000만원에 추가 취득했다.두 차례에 걸쳐 장 고문 개인이 보유하던 영풍 주식 16만9000주, 총 775억6450만원어치가 씨케이로 넘어간 것이다. 영풍 전체 발행주식의 약 9.18%에 해당한다.당시 장 고문이 씨케이에 넘긴 영풍 주식 상당 부분은 불과 1년 전에 사들인 것이다. 장 고문은 2019년 7월 순환출자 해소를 위해 서린상사가 보유한 영풍 주식 19만820주를 1336억원(주당 약 70만원)에 사들였다. 시케이에 매각한 주당 가격은 1년 전 매입 가격보다 약 35% 낮다. 수백억대 손실을 감수하고 보유 지분을 자녀들이 지배하는 가족회사로 넘긴 것이다. 씨케이는 이에 앞서 2020년 약 789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실시했다. 장 고문에게 지급한 영풍 주식 인수대금 약 776억원과 비슷한 규모다. 장 고문 자녀들이 영풍에 테라닉스 지분을 매각하고 받은 대금 504억원은 씨케이 증자 규모의 약 64%다. 일련의 자금 흐름을 두고 연관성을 의심받는 이유다. 씨케이가 증자 대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부동산 거래도 주목된다. 씨케이는 2015년 장 고문과 여동생 장현주 씨로부터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 토지 지분을 76억원에 사들인 뒤 2020년 8월 대선건설에 196억8000만원에 매각했다.당시 토지 지분의 저가 양도 논란과 관련해 국세청은 감정가를 110억원으로 평가하고 장 고문 남매에게 각각 6억9000만원의 양도소득세를 추가 부과하기도 했다.공교롭게도 씨케이의 토지 매각 시점은 장 고문으로부터 영풍 주식을 두 번째로 매입하기 불과 한 달 전이다. 이와 관련 씨케이는 영풍 주식 취득 관련 대량보유상황보고서에서 자금 조성 경위로 '사업소득, 자산매각, 배당금 소득, 유상증자 등'을 명시했다.장 고문 자녀들이 테라닉스 지분 매각으로 확보한 자금을 씨케이 유상증자에 투입하고, 씨케이가 장 고문 남매로부터 사들인 토지를 되팔아 마련한 자금까지 동원해 장 고문의 영풍 주식을 취득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는 이유다.장 고문과 씨케이의 관계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2021년 1월 29일 한국거래소에 제출된 대량보유상황보고서에는 씨케이 대표자는 장형진으로, 최대출자자는 '장세준 외 2명'으로 기재돼 있다.장 고문이 2020년 영풍 주식을 매각 당시에도 씨케이의 경영상 의사결정에 관여했다면 매도인과 매수법인 양쪽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영풍, 오너 3세 지분 매입한 504억…경영승계 마중물?
영풍과 테라닉스 사이에서는 같은 해 또 다른 대규모 거래가 이뤄졌다.영풍은 2020년 4월 인터플렉스 지분 11.10%를 약 230억원에 테라닉스에 매각했다. 당시 공시한 처분 목적은 '지배구조 개선 자금 마련'이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시그네틱스 지분 31.62%를 약 206억원에 매각했다.영풍이 두 거래로 확보한 자금은 약 436억원으로, 앞서 장 고문 자녀들에게 지급한 테라닉스 지분 인수대금 504억원의 약 87%에 해당한다.테라닉스는 2019년 말 기준 현금및현금성자산 약 97억원, 유동 기타금융자산 약 473억원 등 비유동 금융자산까지 합쳐 약 663억원의 금융자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돈이 영풍 계열사 지분 인수를 통해 다시 영풍으로 흘러 들어간 것이다.영풍은 두 상장사 지분을 장부가액보다 낮은 당시 시장가격에 매각하면서 인터플렉스 약 111억원, 시그네틱스 약 205억원 등 총 316억원의 회계상 처분손실을 기록했다. 두 회사의 주식은 모두 매각 당시 종가를 기준으로 거래됐다.이어 2022년 10월 테라닉스는 이 인터플렉스 11.14% 지분을 다시 245억원에 시그네틱스(6.83%)와 영풍전자(4.31%)에 넘겼다.2020년에 영풍에서 테라닉스로 넘긴 지분이 2년 만에 다른 계열사로 다시 이전된 것이다. 거래가격 자체보다 주목할 부분은 영풍이 이미 계열사를 통해 지배하고 있던 테라닉스의 오너 일가 지분을 504억원에 매입하고, 같은 해 자신이 보유한 상장 계열사 지분을 테라닉스로 이전한 이유다. 영풍은 인터플렉스 지분 매각 목적을 '지배구조 개선 자금 마련'이라고 공시했다. 실제로 테라닉스는 과거 총수 일가 지분율이 높아 일감몰아주기 규제와 관련해 논란이 된 회사다. 오너 일가 지분을 정리해 규제 부담을 덜었다는 점은 '지배구조 개선' 차원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은 일련의 거래가 영풍의 사업과 일반주주에게 어떤 실질적 이익을 가져왔는지는 물음표다. 2020년 이뤄진 지분 거래의 핵심은 영풍이 장 고문 자녀들에게 지급한 504억원의 최종 사용처다. 이 자금이 씨케이 증자를 거쳐 장 고문의 영풍 주식을 취득하는 데 활용됐다면 상장회사 자금이 오너 일가의 지배력 이전을 지원한 셈이어서 논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