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개척자에서 조력자로…금융권 여성들의 ‘연결고리’를 만나다
- [여성 리더십, 금융의 새 공식]③ 김상경 한국국제금융연수원 원장
“유리 천장보다, 더 강력한 유리벽 문제”
“여왕벌 되지 마세요”…잠재력 높은 여성 동료 후원 필요

[이코노미스트 김윤주 기자] 서울 명동 인근 골목의 언덕을 따라 천천히 오르다 보면, 남산타워가 점차 가까워진다. 그 언덕 끝자락에는 ‘한국국제금융연수원’이 자리해 있다. 이 곳은 김상경 원장이 설립한 금융 교육기관으로, 그의 금융 철학과 여성 리더십이 뿌리내린 공간이다. 건물 앞마당은 김 원장이 직접 가꿨다. 다정하면서도 깔끔한 정원은 리더로서 그가 지녀온 태도와 닮아 있다. 국내 1세대 외환딜러로 화려하게 활동하다 금융 교육자로 변신하기까지, 국내 금융권 여성 리더십의 지평을 확장해온 과정을 들어봤다.
“직장에서 늘 혼자” 1세대 여성 외환 딜러 후일담
결혼이 여성 인생의 전부처럼 여겨지던 시절, 어머니가 금반지를 팔아 마련한 등록금으로 대학에 진학한 딸은 외국계 은행에서 타자를 치다 ‘외환 딜러’라는 낯선 직업에 도전했다. 국내 여성 외환딜러 1세대인 김상경 한국국제금융연수원 원장의 얘기다.
김 원장의 커리어 시작은 ‘금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제도사 아르바이트로 대학 학비를 충당했고, 이후 외국계 엔지니어링 회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 1975년 스탠다드차타드 은행으로 이직하며 금융업계에 발을 디뎠다. 1년 반 뒤에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아멕스) 은행의 비서직으로 옮겼다. 당시 아멕스 상사가 그에게 외환딜러로 변신을 제의했다. 32살에 시작한 외환딜러 일은 고된 여정이었다.
김 원장은 “당시 딜러라는 직업이 국내 어느 은행에도 없어 배울 만한 곳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딜러는 걸으로 보여지는 것 만큼 멋지고 속 편한 직업이 아니었다”면서 “24시간 전세계 외환시장이 열려 있어 밤에도 일해야 했고, 해외 출장도 잦아 아이들 육아 문제가 걱정이었다”고 말했다.
딜러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시절, 여성 멘토도 없었다. 그는 “직장에서 여성으로서 늘 혼자였고 내 자신이 개척해야만 했다”며 “그러나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두려움이 없으셨던 어머니가 나의 정신적 지주였다”고 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모여…여성 네트워크의 시작
15년의 딜러 생활 후, 김 원장은 멈춰 섰다. 그리고 1995년 자신이 대주주로 ‘한국국제금융연수원’을 설립했다. 그렇게 올해로 연수원은 30주년을 맞이했다.
김 원장은 “48세에 회사를 만들었다. 급변하는 국제금융 환경에 대처할 수 있는 전문가를 키우는 유익한 프로그램을 제공하자는 생각이었다”면서 “비록 교육사업이 수익 모델이 아니어서 썩 좋은 투자는 아니었지만 금융권 후배를 위해 가르침을 제공하는 것은 나쁜 선택이 아니었다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여성 리더로서 또 다른 이정표도 세웠다. 2002년 크리스마스 이브, 국회에서 여성 금융인 관리자들이 참석하는 간담회가 열렸다. 김 원장은 여성 관리자를 대표해 ‘금융 개방화 시대의 여성 금융인의 역할과 지위 개선방안’을 주제로 기조연설을 했다. 그날 간담회에 참석한 23명의 여성 관리자들은 여성 금융인을 위한 네트워크 형성에 뜻을 모았다. 이렇게 2003년 1월 ‘여성금융인네트워크’가 탄생했다.
김 원장은 “네트워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연결이 된다”면서 “남성들은 밥 먹으면서도 자연스럽게 네트워킹 하는데, 여성들 또한 그런 네트워크 자리를 마련해보자는 취지였다”고 설명했다.

‘유리천장’보다 ‘유리벽’이 문제…글로벌 참고해야
김 원장은 금융권 내에 존재하는 ‘유리벽’(Glass Wall) 문제를 지적한다. 유리벽이란 여성 인력들이 특정 부서에 머무르며 주요 직무에서 배제되는 일이 반복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또한 핵심보직에 대한 접근 기회 부족, 비공식 네트워크에서 소외 등은 여성 인력 승진의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설명이다.
김 원장은 “여성들이 승진하지 못하는 이유는 능력 부족이 아니고 ‘기회의 문’ 자체가 닫혀 있는 것”이라며 “금융권의 경력 경로에서의 출발선에서는 여성과 남성이 크게 다르지 않지만 일정 위치를 넘어서면 여성은 유리천장에 가로막혀 경력이 정체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글로벌 금융기관에서 배울 점이 있다고 말한다. 해외 금융사들은 여성 임원 비율을 핵심성과지표(KPI)에 반영하고 승진 트랙에 있는 여성 인재에게 리더십 트레이닝·해외 파견 기회를 전략적으로 제공한다. 특히 주목할 만한 사례는 2016년 영국 정부의 재무성이 주도한 ‘여성 금융인 헌장’(Women in Finance Charter)이다. 이는 금융회사가 자율적으로 여성 리더 비율 목표치를 설정해 외부에 공개하고 목표에 미달하면 그 사유를 설명하도록 의무화한 제도다.
김 원장은 “영국처럼 여성 리더십 확산을 위한 정부의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금융권이 자율적으로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정책적 장치를 설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새 정부는 여성 리더 확대를 금융산업의 고부가가치 창출 전략이자 국가 경쟁력의 과제로 인식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여성 후배들에 “여왕벌 되지 말라” 조언
김 원장의 행보는 일관되게 ‘지속성’이라는 키워드와 맞닿아 있다. 교육 프로그램 운영과 여성 금융인을 위한 네트워크 구축은 단발적 지원이 아닌, 지속 가능한 역량을 길러주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 이 연장선에서 그는 지난해부터 다문화가정을 위한 사회공헌 사업도 시작했다. 기업은행과 함께, 결혼이주여성과 그 2세를 대상으로 무역전문 인력양성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김 원장은 “참여자들은 총 132시간짜리 교육으로 국제무역사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고, 취업 컨설팅도 제공한다”면서 “사회공헌의 중요한 것은 평생 먹고살 수 있는 디딤돌을 마련해주는 것으로, 올해도 해당 프로젝트 2기를 시행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김 원장은 후배 여성 금융인을 위한 따끔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김 원장은 “불공정한 대우에 좌절하지 말고, 실질적 성과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여왕벌이 되지 말라”면서 “잠재력 높은 여성 동료를 후원하고 성장하도록 조력 불공정한 대우에 전략적·건설적으로 대응해 커리어 목표를 회사에 적극적으로 어필하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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