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일반
대화 대신 소송만 키웠다…‘분쟁 촉진법’ 된 노란봉투법
- 한국사회법학회, HD현대 판결·개정 노조법 학술대회
사용자성·교섭단위 기준 불명확…HD현대 판결로 ‘판례 명문화’ 논리 흔들
“판례 축적 비용을 왜 현장 노사가 부담하나" 지적도
노란봉투법 제정으로 근로계약을 체결하지 않은 원청도 하청근로자의 근로조건을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하면 사용자로 인정하도록 범위를 넓혔지만, 정작 사용자성을 판단할 구체적인 기준과 원·하청 교섭 절차는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특히 지난 5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구 노동조합법 아래에서는 원청과 하청근로자 사이에 근로계약 관계가 없는 경우 원청에 단체교섭 의무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하면서, 노란봉투법이 기존 판례를 명문화한 것이라는 입법 당시 설명도 흔들리고 있다.
한국사회법학회와 노동법이론실무학회, 미래노동법혁신연구회는 24일 서울 중구 상연재 별관에서 ‘HD현대 전원합의체 판결과 개정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시행에 대한 평가와 과제’를 주제로 특별공동학술대회를 열었다.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시행 과정에서 드러난 입법 공백을 어떻게 메울 것인지가 핵심 쟁점으로 다뤄졌다.
“노란봉투법 판례 명문화 아닌 새로운 입법”
논쟁의 출발점은 대법원이 지난 5월 21일 선고한 HD현대중공업 전원합의체 판결이다.
전국금속노동조합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는 원청인 현대중공업에 산업안전과 고용보장, 노조활동 보장 등을 놓고 단체교섭을 요구했지만 회사는 근로계약상 사용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대법원 다수의견은 구 노조법상 단체교섭 의무를 부담하는 사용자는 원칙적으로 ;근로자와 명시적·묵시적 근로계약 관계를 맺은 자'다. 원청이 하청노조 활동에 지배·개입하지 않을 소극적 의무를 지는 것과 단체협약 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교섭해야 하는 것은 구분해야 한다는 취지다.
대법원은 단체교섭 거부가 부당노동행위에 해당해 형사처벌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원청에 적극적인 단체교섭 의무까지 인정하는 데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고, 죄형법정주의에 따라 사용자의 범위를 엄격히 해석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다만 이번 판결은 올해 3월 10일 시행된 개정 노조법이 아니라 과거 법률관계에 구법을 적용한 판단이다. 노란봉투법 자체가 무효라거나 원청 사용자성을 부정한 판결은 아니다.
그럼에도 노동법 전문가들은 이번 판결로 노란봉투법의 성격이 분명해졌다고 평가했다. 노란봉투법이 기존 판례를 그대로 법률에 옮긴 것이 아니라, 종전 법리에 없던 원청의 단체교섭 책임을 새로 만든 ‘창설적 입법’이라는 것이다.
김상민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원청과 하청근로자 사이에 직접적인 근로계약 관계가 없는 경우 원청에게 단체교섭 의무가 없다는 기존 법리가 재확인됐다”며 “개정 노동조합법은 기존 법리를 확인한 입법이 아니라 새로운 내용을 창설한 입법”이라고 말했다.
사용자 정의 한 줄 바꾸고 교섭제도는 방치
전문가들이 보완입법 필요성을 제기하는 가장 큰 이유는 노란봉투법이 사용자 정의만 확대했을 뿐 이를 뒷받침할 제도를 함께 고치지 않아서다.
노란봉투법은 근로계약 체결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근로자의 근로조건을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할 수 있는 지위’에 있으면 사용자로 본다.
그러나 법률에는 어느 정도 권한과 영향력이 있어야 실질적 지배력이 인정되는지, 임금·근로시간·산업안전·고용승계 등 교섭 의제마다 사용자를 따로 판단해야 하는지에 관한 세부 기준이 없다.
양주열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노란봉투법 사용자성 판단을 위한 구체적인 형식적·실질적 요건을 제시하지 않았다”며 “법원의 판단 기준이 쌓일 때까지 노사가 교섭보다 법적 다툼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교섭창구 단일화와 교섭단위 분리도 풀리지 않은 문제다. 기존 노조법은 한 사업 또는 사업장에 복수노조가 있으면 교섭창구를 단일화하도록 규정한다.
하지만 원청 정규직노조와 여러 하청업체 노조가 동일한 원청을 상대로 교섭을 요구할 경우 누구를 하나의 교섭단위로 묶어야 하는지 명확하지 않다.
원청노조와 하청노조가 하나의 교섭창구 단일화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 하청노조만 별도의 교섭단위를 구성해야 하는지, 여러 하청업체 노조 가운데 누가 대표권을 갖는지에 따라 교섭 구조가 크게 달라진다.
고용노동부는 원청노조와 하청노조의 교섭단위를 사실상 구분하는 내용의 상생교섭절차 매뉴얼을 내놨지만, 현행 법률만으로 같은 사용자 아래 복수로 교섭 단위를 나눌 수 있는지를 놓고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양주열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노란봉투법 시행 이후 하청노조의 교섭창구 단일화 절차에서 무수히 많은 법률 해석 문제와 기존 제도와의 충돌이 발생하고 있다”며 “제대로 된 교섭보다 노사 간 분쟁만 증가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현재의 노란봉투법만으로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지 살펴보고, 구체적인 제도 설계를 바탕으로 추가적인 입법이 필요한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판례 축적 비용을 왜 현장이 부담하나”
현장에서는 법원의 판례가 축적되면 불명확성이 해소될 것이라는 입법 당시 설명에 대해서도 비판이 제기됐다.
김인식 공인노무사는 “시간이 지나 판례가 쌓이면 법률 내용이 명확해진다고 하지만 그 사례가 누적되는 동안 발생하는 고통과 갈등, 피해를 왜 현장 노사가 부담해야 하느냐”고 지적했다.
사용자성 판단을 판례 형성에만 맡길 경우 노사는 장기간 노동위원회와 행정소송, 민·형사절차를 거쳐야 한다. 사용자성이 인정되면 교섭 거부가 부당노동행위 형사사건으로 이어질 수 있고, 인정되지 않으면 하청노조는 실제 근로조건을 결정할 권한이 없는 하청업체만을 상대로 교섭해야 한다.
법원의 최종 판단까지 수년이 걸릴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부실 입법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개별 기업과 노조에 전가된다는 지적이다.
김희성 한국사회법학회 회장은 “노란봉투법은 사용자성 판단 기준의 불확실성과 개념의 모호성, 단체교섭 및 노동쟁의 범위의 과도한 확대, 손해배상 제한 설계의 결함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후속 입법과 보완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개정 노조법은 ‘대화 촉진법’이 아니라 ‘분쟁 촉진법’으로 작동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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