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뷰티 DNA 전쟁 포문…‘한국다움’을 증명하라 [K뷰티 글로벌 패권이 되다]①
- 제조기술 넘어 창업자 배경·브랜드 스토리 관심
‘메이드 인 코리아’ 넘어 브랜드 뿌리와 서사 ‘경쟁력’
예쁘다·JIYU로 본 ‘한국다움’의 조건은
[이코노미스트 서지영 기자] K-뷰티의 글로벌 위상이 높아지면서 ‘K-뷰티 DNA’를 둘러싼 정통성 논쟁이 본격화하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한국 화장품 연구개발·생산 전문기업(ODM)에서 생산한 제품이면 모두 K-뷰티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창업자의 배경 ▲브랜드 이름 ▲경영진까지 ‘한국다움’을 증명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 글로벌 시장에서 K-뷰티가 하나의 프리미엄 브랜드로 자리 잡으면서 제조 기술을 넘어 브랜드의 출신과 스토리가 소비자의 선택을 좌우하는 새로운 경쟁 국면에 들어섰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글부터 철학까지…K뷰티 DNA의 진화
지난해 10월 방문한 이탈리아 피렌체 산타마리아노벨라역. 역사적인 구시가지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한 화장품 매장이었다. 선명한 분홍색 간판에는 이탈리아어나 영어가 아닌 한글 ‘예쁘다’와 영문 ‘yepoda’가 정갈하게 적혀 있었다.
유럽 한복판에서 한글을 브랜드명으로 내건 화장품이 현지 소비자에게 과연 인기를 얻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매장 안을 들여다보니 예상과 달랐다. 평일 오후였지만 예쁘다 매장에는 제품을 테스트하는 현지 고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한 여성 고객은 세럼을 손등에 펴 바르며 제형과 흡수력을 확인하고 있었다.
유럽 소비자에게 생소했던 한국만의 DNA가 이제 K-뷰티 브랜드의 차별화된 자산이 되고 있다. 과거에는 한국 공장에서 만든 화장품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경쟁력을 인정받았다면, 이제는 ▲한국의 문화 ▲스토리 나아가 ▲정체성까지 함께 평가받는 시대가 됐다. 피렌체에서 만난 예쁘다는 이런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예쁘다는 샌더 준영 반 블라델과 독일인 공동창업자 베로니카 스트롯만이 2020년 독일에서 론칭한 브랜드다. 네덜란드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블라델 최고경영자(CEO)는 자신의 한국적 뿌리를 브랜드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샌더 대표는 “한국인 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한국식 스킨케어는 자연스러운 일상의 일부였다”며 “서울을 오갈 때마다 유럽 친구들이 K-뷰티 제품을 부탁하는 모습을 보면서 한국 화장품에 대한 높은 관심과 접근성의 간극을 체감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어머니는 브랜드 초기부터 중요한 조언을 해주시는 조력자이자, 제품과 브랜드 방향성에 대한 의견을 아끼지 않는 분”이라고 전했다.
성장세도 가파르다. 출범 5년 만에 예쁘다는 유럽 전역에서 100만명 이상의 고객을 확보했고, 2024년 매출은 6500만 유로(약 1000억원)를 넘어섰다. 전년 대비 큰폭의 성장률을 기록하면서 벨기에 소비재 전문 투자사 베를린베스트가 주도한 시리즈B 투자 유치에도 성공했다. 2025년에는 독일뿐 아니라 이탈리아·영국·프랑스 등지 100여개 이상의 세포라 매장에 입점하며 브랜드 경쟁력을 인정받고 있다.
최근에는 한국 시장에 역진출했다. 서울 성수동에서 팝업스토어를 열며 국내 소비자들과 처음 만났다. 예쁘다 관계자는 “한국에서 시작된 브랜드 철학을 글로벌 시장에서 먼저 인정받은 만큼 한국 소비자들과도 그 경험을 공유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한국 DNA 찾기 ‘안간힘’
한국산 제품만으로는 K-뷰티만의 차별성을 인정받기 어려워지면서 브랜드들도 새로운 과제에 직면했다. 예쁘다가 그렇듯 제품의 성분과 품질뿐 아니라 어떤 한국적 배경을 가진 브랜드인지, 왜 K-뷰티를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한 스토리텔링이 중요해지고 있다.
미국 스킨케어 브랜드 지유(JIYU)는 이런 변화를 보여주는 사례다. JIYU는 그동안 한국에서 R&D와 생산을 진행하는 점을 앞세우며 ‘아메리칸 파운디드 K-뷰티’(American-founded K-Beauty)로 소개해왔다. 한국의 앞선 화장품 제조 기술과 성분 경쟁력을 기반으로 미국 시장을 공략해 탄생한 브랜드다.
JIYU는 올해 650만달러(약 90억원) 규모의 투자를 유치했고, 아마존과 틱톡숍을 중심으로 판매를 확대하며 올해 매출 7000만달러(약 950억원)를 목표로 하고 있다. 미국 뷰티 전문 매체들도 JIYU를 빠르게 성장하는 K-뷰티 브랜드 중 하나로 소개했다.
그러나 성장할수록 JIYU도 K-뷰티 정체성 검증을 피하기 어려웠다. 해외 뷰티 커뮤니티와 SNS에서는 “JIYU가 한국과 어떤 관계가 있나”, “한국에서 제조한다고 모두 K-뷰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공장만 한국에 있는 브랜드 아니냐”는 반응이 나왔다. 제품의 제조국을 넘어 브랜드의 출발점과 창업 배경, 한국과의 연결성을 묻는 목소리가 커졌다.
결국 JIYU도 한국 색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하는 모습이다. 회사 측은 지난 7월 1일 한국 출신 사업가 소라 리를 공동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로 선임했다고 발표했다. 리 CEO는 메타·넷플릭스·틱톡 등을 거친 마케팅 전문가다. 과거 국내 연애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이름을 알린 인물이기도 하다.
K-뷰티의 인기가 커질수록 브랜드가 가진 ‘한국다움’을 증명하는 기준도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K-뷰티가 ‘만드는 힘’에서 ‘설명하는 힘’까지 요구받는 단계로 진화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업계 관계자는 “JIYU 사례는 K-뷰티의 기준이 단순한 생산지를 넘어 브랜드의 출신과 이야기로 확장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며 “한국에서 만든 제품이라는 사실만으로는 글로벌 소비자를 설득하기 어려워졌고, 이제는 브랜드가 가진 한국적 뿌리를 어떻게 보여주느냐가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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